[회원인터뷰]  김소영 회원(2013년10호)
등록 2013.10.3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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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소한(?) 육아일기

 

 

몇 개월 전부터 회원인터뷰를 위해 김소영 회원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두 아이의 엄마이다 보니 시간 약속을 잡는 것이 녹록치 않았다. 시간 내는 것은 물론 아이 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위해 김소영 회원의 집을 직접 방문하기로 했다. 그런데 인터뷰 당일 집 앞에 도착해 여러 차례 전화를 했으나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아이를 재우다 같이 잠들었다는 김소영 회원의 전화였다. 살았다! 인터뷰 전부터 나를 들었다 놨다 한 그녀, 김소영 회원을 드디어 만났다.
대학시절 애칭이 ‘꼬소’였다는 김소영 회원. 본인 소개를 할 때 고소영이라고 하고 다녀서 ‘꼬소’라는 별명이 붙었다는데.. ‘꼬소’ 김소영 회원이 두 아이와 깨볶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인터뷰 전 아이들이 잠든 덕분에 집안은 고요했다. 아이들이 깨기 전 얼른 인터뷰를 진행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김소영 회원과 거실에 마주 앉았다. 아이들이 깰까 목소리도 낮춰가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급한 마음에 소개도 생략한 채 사전에 입수한 정보 중 가장 흥미로운 질문부터 던졌다.

나의 길을 찾다

김소영 회원은 첫 입학한 대학에서 언론홍보학과를 전공했다. 차분하고 단아한 외모와 달리 고등학교 때는 기발한 것을 좋아하고 재미있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창의적이고 기발한 걸 하고 싶어 광고학과를 지원했었는데 광고 현장이 너무 치열하고 경쟁적이다 보니 마음을 두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 그녀는 4학년 마지막 학기 때 특수교육 관련 수업을 듣고는 너무 흥미로워서 ‘이걸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당시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이 분야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결국 그녀는 졸업을 하고 다시 수능을 봐서 특수교육과에 입학했다.

“나도 그런 쪽에서 일을 하면 어려운 사람들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겠구나, 믿고 맡길 수 있는 선생님이 있으면 참 좋겠구나 싶었어요.”

처음에는 졸업하고 언어치료사가 되기 위해 출신 대학의 대학원 언어치료 전공에 지원했는데 떨어졌다고 한다. 같은 학교 출신이니까 붙겠지 생각하고는 면접 당일에 옷을 예쁘게 차려입고 갔는데 준비가 너무 안 돼서 똑 떨어졌다고. 그리고는 차라리 특수교육과를 가볼까 해서 그 다음해에 수능을 봤다는 것이다. 그것도 우연히 고등학교 사이트에 갔는데 수능 접수를 받길래 일단 해봐야겠다 해서 접수를 하고 딱 48일 공부해서 수능을 봤다. 그렇게 특수교육과에 가게 됐다.

‘희망숲’을 가꾸다

그녀는 두 번째 대학생활에서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두 번째 다니는 대학교이기도 하고 어머니도 편찮으시다 보니 등록금을 마련하기가 어려워서 무조건 장학금을 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 2등을 했는데, 1등은 전액장학금인 반면 2등은 70만원뿐이어서 ‘여긴 무조건 1등밖에 없구나.’ 생각하고 그다음부터 무조건 1등만 했다고.

그녀는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며 학교생활을 즐기는 데도 열정적이었다. 두 번째 대학생활은 다른 학생들과 나이차도 있고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더니 특수교육과는 과 특성상 나이 있는 사람들이 많고 그녀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과 만든 모임이 ‘꺾人’ . 25살 이상만 가입할 수 있는 ‘꺾인 사람들의 모임’이란다.

3학년 때는 장애인권 소모임 ‘희망숲’을 만들었다. 같이 장애인권 영화제를 보러 다니고 직접 영화제를 하기도 하고 가끔은 학내 음주를 즐기는 일탈(?)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학교는 종교재단의 학교이다보니 학내 음주가 금지돼 있다.)

그러다 이전 학교의 선배를 통해 아산 농민회랑 연결을 해서 농활도 가기 시작했다. 농민회분들과 소통하며 시야도 넓히고, 함께 장애인권에 대해서도 얘기하며 활동이 불타올랐다고 한다. 당시 다니던 학교는 희망숲이라는 소모임 자체도 쇼킹할 정도였고, 농활이라는 것은 존재도 모를 정도로 생소했는데 김소영 회원 덕분에 새로운 문화가 생겼다. 한 사람의 역할이 큰 변화를 낳은 셈이다.

“두 아이와 징~한 연애 하고 싶어요.”

학교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특수반의 기간제 교사로 일을 시작한 그녀는 학교 업무가 일찍 끝나 퇴근 후 기타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두 달여간 다니다가 그만 두려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뒤풀이에 참석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그 자리에서 지금의 남편 분을 만났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한 달을 더 다니고 같이 학원을 그만뒀다고. 그러면서 나에게도 기타학원이나 동호회에 나가보라며 학원 이름과 위치를 넌지시 알려줬다. (혹시 이 얘기에 귀가 쫑긋하는 분이 있다면 연락주시라.)

하지만 결혼을 하고 첫 아이를 임신하면서 일을 그만둬야 했다. 1년 계약이 끝나고 다른 학교에 면접을 봐서 일을 하게 됐는데 나중에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서 계약기간보다 일찍 그만 두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세 살 배기 딸과 두 살 배기 아들의 엄마인 그녀는 큰 아이를 낳고 다시 일을 했지만 육아도, 학교 일도 제대로 하기 어려워 한 학기만 하고 결국 육아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녀는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서로의 모난 부분을 부딪쳐 가며 다듬어 가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힘이 되는 건 바로 남편과의 ‘연애시절’이었다고. 연애하며 두근거렸던 순간, 사랑했던 추억들, 그 때 다짐했던 약속들.. 이런 추억들을 하나씩 뜯어 먹어가며(?) 힘을 낸다는 김소영 회원.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였단다. 아이들이 평생 살아가는 힘도 ‘엄마와의 연애시절’에 달려있는 게 아닐까. 엄마와의 연애시절에 얼마나 충분한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느냐에 따라 아이가 평생 살아갈 힘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 좀 힘들어도 아이들과 징~하게 연애 한 번 해 보자. 훗날 떠올려보면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예쁘고 행복한 순간일 거야.’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은 아이들에게 뿐만 아니라 본인에게도 ‘아이들과 연애하는 시간’이라며, 훗날 아이들을 키우며 힘든 일이 생겨도 지금 이 순간을 떠올리며 웃음 짓고, 인내하며 힘든 과정을 견뎌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동안은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전했다. 본인이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가 집에 있는 게 너무 당연했고, 그게 참 좋았던 기억이 있다면서.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 시간을 관리할 수 있을 때가 되면 다시 특수교사 임용시험에 재도전 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지금 이렇게 아이들 키우면서 쌓아온 소중한 경험들을 훗날 학교 현장에서 만날 학생들에게 쏟고 싶어요. 아이들 낳기 전에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쌓았던 교육경험들이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도 유익한 것처럼요.”

더불어 엄마의 임용으로 아이들이 엄마의 노후 걱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한마디도 덧붙였다.


민언련, 세상과 소통하는 창

“민언련은 참 부지런한 것 같아요.”

김소영 회원은 민언련에 한마디 해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얘기했다. 문자도 자주 보내고, 때 되면 소식지도 보내며 잘 살고 있다고 친절하게 소식을 알려주는 민언련이 참 한결 같아서 좋단다. 그러면서 “민언련이 저한테 하는 것처럼, 제가 우리 엄마한테 하면 엄마가 참 좋아할텐데 말이에요. 그쵸? 하하하~”하고 멋쩍어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저 지금처럼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당부를 했다. 
 
“아이들 키우느라 티비도 안 보고, 인터넷도 안 하는 저에게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려주는 유일한 통로가 민언련이거든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심해지고, 둔감해질 수 있는 저에게 자극제가 되어주는 민언련, 앞으로도 화이팅입니다!!”

2004년 학교 선배인 조영수 부장이 민언련에 활동가로 들어오면서 김소영 회원에게 민언련 가입을 권유했다고 한다. 물론 조영수 부장은 기억을 못 했지만, 그렇게 민언련과 인연이 닿은 그녀는 무려 10년 동안 묵묵히 민언련을 후원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하느라 민언련 활동에 참여하기 어렵지만 머지않아 김소영 회원을 민언련 회원 모임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