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가는 여행] 선과 선으로 이어지는, 제주도 버스여행(2013년10호)
등록 2013.10.3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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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선으로 이어지는, 제주도 버스여행

 

유정아 회원 l zorba729@daum.net

 

 

나는 대중교통과 도보를 이용한 여행에 익숙했다. 아직 면허가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내 자신이 그걸 즐기기 때문이기도 했다. 누군가 자가용 여행은 ‘점의 여행’이고, 버스 여행은 ‘선의 여행’이라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에 격한 공감을 보냈었다. 보고 싶은 곳을 빠르게 ‘찍고’다니며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는 것도 좋다. 하지만 먼 길로 빙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예상치 못했던 풍경을 맞닥뜨리며 다니는 그 맛(?)은 중독성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지루한 무더위의 끝이 보이던 지난 8월 말, “올 가을에는 꼭 제주도엘 가겠다”며 벼르던 나는 날이 조금 선선해지기 무섭게 표를 끊었다. 11박 12일의 일정. 휴가치곤 좀 길다 싶었지만, 어릴 때 한 번 가본 제주도를 혼자 실컷 보고 오겠다는 마음이 더 컸다. 표를 사 놓고 여기저기 자랑을 했다. 그런데 제주도를 버스 타고 여행하겠다고 하니, 다들 걱정부터 먼저 하는 게 아닌가.


“버스가 자주 다니지도 않고, 거의 큰길로만 다녀서 렌트카 없으면 고생할 텐데..”
처음에는 괜찮다고 웃어넘겼지만 같은 일이 반복되자 살짝 불안해졌다. ‘가서 헤매다 끝나는 거 아닌가.’ 계획 세우는 걸 잘 못해 대부분 일정 없이 가곤 했지만, 이번에는 동선을 대충이라도 계획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일정을 짠다고 자리 잡고 앉았다가 남들이 찍은 제주도 사진에 환호하며 왜 컴퓨터를 켰는지조차 잊어버리기를 수십 번. 결국 가이드북 하나 없이, 꼭 가고 싶은 곳 서너 군데의 ‘이름만’ 머릿속에 넣고 첫날 숙소 하나만을 잡아놓은 채 출발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도착한지 하루 만에, 나는 사람들이 왜 제주도 버스 여행을 염려했는지 깨달았다. 친절한 전광판에 익숙한 내게, 제주도 버스 시스템은 알 수 없는 암호처럼만 느껴졌다. 차 시간표 보는 법을 이해하는 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매번 30분에서 길게는 한 시간까지 버스를 기다려야 했고, 차를 갈아타다 헤매기도 했다. 하루에 관광지 두세 군데를 가면 많이 보는 거였다. 가기 전에 걱정을 들은 대로, ‘길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던 셈이다.

 

그러나 걱정이 들어맞은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단 한 순간도 들지 않았다. 그건 아마도 그곳이 제주도였기 때문일 것이다. 관광지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을 정도로 눈만 돌리면 ‘그림’이 펼쳐졌다. 다니는 내내 나는 주변 풍경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실수로 내린 시골 동네조차 당황스러움보다는 정겨움을 안겼다. 모두 차를 몰고 다녔다면 얻을 수 없는 경험들이었다.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유명 관광지에 갔다가 그 어수선함에 질린 적은 있었지만, 버스를 타다 마주친 것들은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다.


굳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아도 즐길 거리가 사방에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마음이 느슨할 정도로 편안해졌다. 차에서 보낸 시간이 아무리 길어도 하루를 꽉 채운 느낌이었다. 뭘 봐도 좋은데 관광지 한 군데 못 간들 어떠랴.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과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다 다 같이 다음날 일정을 포기한 채 해변에서 일출을 보기도 했고, 마음 맞는 이들과는 며칠 동선을 맞추기도 했다.


그렇게 제주도 한 바퀴를 돌았다. 듬성듬성 다닌 것 같았는데, 돌아보니 그래도 웬만한 곳은 모두 다녀왔다. 한라산에 올랐고, 그려놓은 듯이 파란 바다에서 스노클링도 했다. 책 한권 들고 바닷가 파라솔 아래 앉아 하루 종일 꼼짝 않는 여유도 부려봤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던 열흘이 어느새 꽉 채워진 것이다. 그런데도 돌아오는 발걸음은 마냥 아쉬웠다.

 

다녀오고 난 후,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은 “어디가 제일 좋았냐”는 거였다. 하지만 특별히 한 군데가 떠오르지 않았다. 바다를 생각하면 해변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여러 바닷가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들이 먼저 떠오르고, 산과 숲을 생각하니 걸어다니며 느꼈던 상쾌함만 기억났다. 모든 기억이 하나로 다 엉켜 있어서 어떤 장소나 시간 하나를 떼어내기가 어려웠다. 아마도 버스를 타고, 선과 선을 잇대어 다녔기 때문이 아닐까.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대여섯 명이 협재 해변에 둘러앉아 새우깡 몇 봉지 놓고 새벽까지 술잔을 기울였던 밤, 멀리 반짝거리는 한치잡이 배를 보면서 누군가 “제주도는 딴 세상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말에 전적인 동의를 했었다. 찾아가는 길마저 여행으로 남는 섬. 정말 그곳은 다른 세상처럼 보였다.
물론, ‘딴 세상’ 제주도에서 버스만 타고 여행한다는 건 품이 많이 드는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서, ‘끊어지지 않는’ 버스 여행의 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었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한 번쯤은 버스카드 한 장과 두 다리를 믿고 제주도에 찾아가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