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트와 과학으로 무장한 철두철미한 현장 언론인
공영방송이라는 탈을 쓴 방송사들이 여전히 정권의 발밑에 넙죽 엎드려 있다지만 현장에는 아직도 가슴속에 불씨를 품은 이들이 있다. <경찰청 사람들>, <생방송 화제집중 6시>, <피자의 아침>, <이제는 말할 수 있다>, <PD수첩> 등 MBC의 다양한 시사 교양 프로그램 PD를 거쳐 지금은 MBC 경인지사 특별기획팀장이자 MBC PD 협회장으로 있는 박건식 회원 역시 방송계의 현안을 날카롭게 짚을 줄 아는 눈 밝은 언론인 가운데 하나다. 지난 1월 9일 목동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앞에서 열린 ‘심의규정 개정안 반대’ 기자회견에서도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방심위는 해산되어야 한다”고 잘라 말한 바 있는 그를 MBC 경인지사 사무실에서 만나 보았다.
내로라하는 시사 교양 전문 박건식 PD를 이 바닥(?)에 뛰어들게 만든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뜻밖에도 박건식 회원은 허준의 일대기를 그린 <집념>이라는 옛날 드라마를 보며 PD라는 꿈을 키웠다고 이야기한다.
“중학교 때 <집념>을 보면서 ‘나도 저런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했었어요.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기자든 피디든 언론인으로 살고 싶어서 신문을 많이 읽었죠. 그런데 정작 대학 들어가서는 학자가 되고 싶어서 공부만 계속 했어요.”
그가 대학원 다니며 책만 들여다보던 시절은 1987년 민주화운동의 뜨거운 기운이 전국을 뒤덮은 시기였다. 당연히 몸이 근질거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시절에 학교 안에만 있으려니 많이 답답했죠. 그래서 언론인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고, 결국 남들보다 뒤늦게 뛰어들게 됐어요. 그렇게 세계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95년에 PD 시험을 보고 MBC에 입사하게 됐죠.”
<생방송 화제집중 6시>로 처음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맡게 된 박건식 회원은 이후 다른 프로그램들을 거쳐 2002년에 <PD 수첩>으로 오게 되고, 최승호 한학수 PD와 함께 한국 사회의 민감한 부분을 들추는 시사 보도를 쏟아 내게 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숱한 보도들 가운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는지 물어보니 그는 <북파공작원> 편(2002년)과 <광주 인화원> 편(2005년)을 꼽았다.
“북파공작원들의 인권 실태를 보도하면서는 일단 용어 때문에 회사(MBC)와 치열하게 싸웠어요. 정부에서 항의가 들어왔다는 이유로 북파공작원이라는 용어 자체를 못 쓰게 했거든요. 보도국에선 용어를 아예 ‘대북전문요원’으로 바꿨어요. 하지만 저는 북파공작원이라는 용어를 쓰는 게 그분들의 실체를 규명하고 권익을 회복하는 데 필요하다고 논리를 잡아 위에 보고했어요. 북파된 적은 없더라도 북파를 목적으로 훈련을 받았으니 북파공작원이라 부르는 게 맞다고도 이야기했고요. 그게 통과돼서 PD수첩에서는 북파공작원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당시 뉴스데스크에서는 대북전문요원이라는 용어를 썼어요.
방송이 나가고 나서 실제로 그분들이 보상을 받기도 했어요. 그분들은 분명 국가 폭력에 희생된 분들이었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광우병 쇠고기 보도 때 MBC 앞에 가스통 들고 시위 나오시는 분들을 보니 다 그분들이었어요. 배신감 같은 게 느껴져서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 수 있느냐고 그쪽에 항의하기도 했는데 알고 보니 제가 취재했을 때 있던 분들은 다 쫓겨나고 이상한 사람들이 밀고 들어왔던 거였어요. 국가 폭력에 희생됐을지라도 아직 각성하지는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룰 때는 좀 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죠.”
<광주 인화원> 편은 2011년에 개봉한 영화 <도가니>가 한국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게 된 이후 새롭게 조명받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PD수첩이 일궈 낸 ‘값진 성취’로 여겨지는 <광주 인화원> 편을 이야기하는 박건식 회원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공지영 씨가 <광주 인화원> 편을 보고 소설도 썼고 그게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사실 처음에 취재할 때 굉장히 망설였던 아이템이었어요. (현장 취재는 김재영 PD가 대부분 했어요.) 피해자들의 진술만 있고 아무런 증거가 없었거든요. 결과적으로 사실과 들어맞았기 때문에 반향도 컸고 공익적 기여를 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위험이 너무 컸죠. 방송사의 위험이나 PD수첩의 위험보다 몇 백 배 더 큰 건 당사자들의 위험이에요.
확고한 증거가 없고 신뢰도가 약할 경우 사명감만 지닌 채 가는 게 맞냐. 그때는 사명감만 갖고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팩트인 거죠. 그건 프로그램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건 당사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해요. 어쨌든 지금 생각해 보면 굉장히 무모한 보도였어요.
요행을 바라고 무모하게 하는 취재는 최소화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막상 취재하면서는 피해자를 신뢰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에요. 앞으로 또 광주 인화원 같은 사건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그곳으로 갈 수밖에 없죠. 그래서 늘 마지막 순간까지 확인하고 의심하고, 취재엔 더 신중하고 철두철미하게 임하는 것이 기본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열정과 분노’,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과학적 탐사와 팩트 확보’가 동시에 병행되어야 하는 거죠.”
‘팩트’와 ‘취재의 과학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박건식 회원은 실제로 최승호 PD와 함께 미국에 있는 저널리즘 스쿨에서 데이터 저널리즘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팩트가 스스로 말하게 하라’는 명제를 가슴속에 새길 수 있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는 MBC 임원진 앞에서 ‘과학적 탐사보도’의 필요성에 대해 발표하기도 했죠. 탐사보도를 위한 전문 연구원을 영입하고, 방대한 데이터 처리를 위한 예산도 확보했어요. 그리고 4대강 문제, 지방자치 문제, 검사와 스폰서, 낙하산 문제, 부동산 문제, 외교 문제, 사법부 전관예우와 양형 문제 등 PD수첩이 다룬 다양한 보도에 과학적 탐사보도 기법을 반영할 수 있었어요. 이전보다 보도 내용이 상당히 충실하고 탄탄해졌다는 평가를 받았죠.”
김재철 사장이 낙하산을 타고 MBC로 떨어진 후 PD수첩의 PD들은 하나 둘 정리되기 시작했다. 박건식 회원도 2011년 3월에 MBC 경인지사로 옮기게 되었고 지난해 8월부터는 MBC PD협회장이라는 묵직한 책임을 받아들여 지금까지도 언론 운동의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MB 정권은 정권에 대한 비판엔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보도를 금지했지만 정권 비판이 아닌 다른 사안들, 이를테면 국정원이나 종북몰이를 비판하는 보도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박근혜 정권은 보도 금지뿐만 아니라 거기에 공안탄압과 사상검증이라는 것까지 강요하고 있습니다. 강도가 훨씬 높아진 거죠. 최근의 역사 교과서 문제와 관련해 생각해 보면, 방송과 교과서를 장악한다는 것은 현재를 장악하는 것을 넘어 우리 이후의 세대까지 계속 영향을 미치려 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즉 박근혜 정권은 사상검증을 넘어 나중엔 아예 사상적 기반을 바꿔 버리는 사상개조로 갈 수도 있다는 거죠. 일본 자민당의 영구집권 프로젝트처럼요.
사실 모든 정권은 언론을 장악하려고 해요. 그건 노무현 정권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노무현 정권도 자기네들을 비판하는 보도는 싫어했어요. 다만 ‘점잖음’의 차이는 있었죠. 노무현 정권은 정권 비판 보도에 불만을 표시하거나 합법적 항의를 하는 선에서 그쳤거든요. FTA를 추진하면서는 정권에 대한 비판 보도를 쏟아내는 PD들에게 같이 토론해 보자고 먼저 제안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MB와 박근혜 정권은 그렇지 않다는 거죠.”
사상검증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면 우리가 언론 개혁이라는 영역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무척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박건식 회원은 차분한 목소리로 생각을 들려주었다.
“지금이 제일 중요하고 힘든 시기잖아요.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걸 정부가 잘 몰라요. 창조경제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인데 지금 그게 없으니 창조경제가 잘 될 리가 없죠. 창의는 표현의 자유에서 태어납니다. 지금 MBC도 표현의 자유를 막고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들이 잘 안 되고 있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 한명 한명이 표현의 자유를 위해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하는 것. 역시 그게 가장 중요하겠죠. 방송 하나하나를 정확히 모니터링 하는 일은 품이 정말 많이 들고 힘들어요. 하지만 언론의 활동을 계속 주시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요소들에 대해 방통심위나 언론사에 적극적으로 비판적 의견들을 개진한다면 그건 방통심위가 하는 심의보다 더 중요한 일이 되겠죠. 그렇게 자기가 할 수 있는 합법의 공간에서 최대한 활동할 수 있어야 해요. 언론사들의 활동이 많이 위축돼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시민운동의 영역에서 모니터 활동이나 규탄 활동을 통해 표현의 자유라는 싸움을 점점 더 큰 미디어 영역으로 확장해 나가야겠죠.”
지난 2004년부터 민언련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는 박건식 회원은 민언련 회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말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활동을 열심히 해 주는 민언련 회원들이 늘 고마워요. 민언련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 정도의 언론 자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고상한 학술대회들도 좋지만 역시 현장에서 활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인터뷰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오자 소스라치게 추웠다. 바로 눈앞에는 여의도 MBC 본사의 보랏빛 건물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저 견고한 성 안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누가 높은 곳에 올라앉아 으르렁거리고 있을까? 몇몇 높은 사람들을 콕 집어 비난을 퍼붓는 것은 무의미했다. 땅으로 내리꽂히는 눈송이 하나하나는 추운 겨울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살 떨리는 추위는 어디서 왔을까? 누가 우리를 춥게 만들었을까?
어디서 이 바람이 시작됐는지. 산 너머인지. 바다 건넌지. 너무너무 얄미워. 횡단보도 앞에 서서 초록불을 기다리고 있자니 뜬금없이 입에서 오래된 동요가 흘러나왔다. 추위를 몰고 온 누군가가 몹시 미워졌다. 민언련 사무실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니 따스한 기운에 몸이 녹기 시작했다. 나는 박건식 회원이 들려준 이야기를 다시 곱씹으며 마음을 녹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