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서 삶의 방식으로 운동하라
민언련 사무실에는 멀리 한겨레신문사 건물이 보이는 베란다가 있다.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다가 문득 바깥세상이 그리워질 때면 베란다에 나가 담배 한 대씩 태우고는 하는데 그때마다 한겨레신문사는 마치 녹색 띠를 두른 마법의 궁전 같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막장 수구언론들이 부자들 편에 서서 제멋대로 붓을 휘두르고 있는 팍팍한 현실 속에서는 어떻게든 민중들의 삶을 이야기하려는 기자들의 노력이 착한 마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랬는지,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로 있는 한승동 회원을 만나러 한겨레신문사 6층으로 올라가는데 공연히 마음이 설레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국사책에 보면 독립운동가나 지사, 애국자들 가운데 기자가 많잖아요. 그런 인물들을 책 속에서 배우면서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됐어요.
박정희 정권 시절 대학생이었던 한승동 회원은 유신 반대 시위를 하다 2년 동안 옥살이를 하게 되고 학교에서도 제적당하고 만다. 두 차례나 제적당한 끝에 나중에 복학이 허용됐지만 대학이 엄격한 ‘출석일수 규정’을 들이대는 바람에, 이미 생계를 꾸려가야 했던 한승동 회원은 끝내 졸업장을 받을 수 없었다.
당시 일간지 기자가 되려면 대학 졸업장이 필요했고 나이 제한에도 걸리면 안 됐어요. 그때 입사시험을 칠 때 학력 제한이 없었던 신문사도 있었지만, 나이 제한에 걸리는 바람에 거기마저 시도해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죠.
이른바 ‘일반적인 루트’를 통해 기자 될 기회가 박탈된 상황에서 한승동 회원은 사보를 만들거나 기업의 홍보담당 직원을 거드는 등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출판, 편집 일을 배웠다. 그러다가 1986년 민언련의 전신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기관지인 『말』지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저런 경로로 인연을 맺은 사람들 중에 『말』지에 있던 해직기자 출신 박성득 선배의 배려로 역시 해직기자 출신인 김태홍(언협 초대 사무국장 및 전 의장) 선배를 만났죠. 『말』지엔 그렇게 들어가게 됐어요. 그런데 처음엔 기자로 들어간 게 아니라 『말』지 만드는 사람으로 들어갔어요. 편집도 하고 디자인도 했죠. 첫 작품이 바로 유명한 ‘보도지침’이었는데, 거기에 짤막한 해설을 다는 항목 몇 개를 쓰기도 했지요.
이미 박정희 정권 때부터 권력과 놀아나기 시작한 언론사들은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는 아예 권력자들의 나팔수가 되어 버렸다. 정부가 언론사로 날마다 보내온 ‘보도지침’에는 보도의 방향과 내용이 정권의 입맛에 맞게 다듬어져 있었고 언론들은 그 ‘친절한’ 지침들을 충실히 지키며 신문과 잡지를 만들었다. 1986년 9월에 나온『말』지 ‘특집호’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보도지침은 가뜩이나 정당성도 도덕성도 없던 전두환 정권의 추악한 맨 얼굴을 드러나게 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보도지침을 특집호를 만들면서 저도 글을 쓰게 되었고, 그 뒤로는 편집과 제작 일을 하면서 기사도 함께 쓰기 시작했어요. 보도지침 폭로 이후 김태홍 선배와 신홍범(언협 실행위원 및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전 위원장) 선배가 나중에 구속까지 됐지만, 당시 홍수원, 박우정 선배 등 해직기자 출신 실무자 선배들이 모두 잠수 타고 하니까 언협에는 송건호(언협 초대 의장) 선생님과, 이석원 선배 이하 후배 실무자 그룹만 남게 됐죠. 그 상황에서 우리 실무자들은 『말』 제작과 배포를 계속하기로 했고 그때부터 실무자들이 분야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다 나눠 쓰게 됐어요.
전두환 정권이 거꾸러지기 전까지만 해도 『말』지는 ‘불법’ 간행물이었다. 한승동 회원을 비롯한 언협 식구들은 살벌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든 『말』지를 만들기 위해 군사독재 정권과 피가 마르는 숨바꼭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협 사무실이 노출되면 안 되니까 이곳저곳에 사무실을 여럿 만들어 놓기도 했고, 아는 사람의 가정집을 이용하기도 했어요. 우리끼리 평소에 부를 때도 가명으로 불렀죠. 『말』지 인쇄도 을지로 인쇄 골목에 있는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맡겼어요. 인쇄가 끝나면 우리가 봉고차 몰고 가서 받아 왔고 배포도 우리가 직접 했죠. 그렇게 『말』지가 나오면 김태홍 선배가 끌려가 일주일씩 구류를 살았어요. 그러다가 6월 항쟁이 지나고 나선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죠. 1988년 무렵부터는 『말』지에 기명 기사도 쓸 수 있었고요.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한 날들이었지만 한승동 회원은 그 시절이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재밌던 시간들이었다고 말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지 만들던 때가 제일 재미있고 신나게 살았던 시절이었어요. 겁도 안 났죠. 잡혀간다고 해도 어차피 그런 건 다 운동의 일환이라 생각했으니까요. 게다가 그때는 ‘유신 잔당과 군사독재 퇴진’이라는 목표가 명확하게 있었고, 사회 분위기도 암묵적이지만 우리에게 우호적이었어요. 바로 우리가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확신이랄까? 그땐 그런 희망이 있었어요.
어떻게 보면 언협 시절에 제 삶의 진로가 정해진 거잖아요. 그 어렵고 엄혹한 시절에,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정말 ‘미친 짓’을 하고 다녔으니까요. 그렇지만 그런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요. 쉬운 세월은 아니었고 때론 좌절도 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긍지를 느낍니다.
한승동 회원은 1988년 언협과 『말』지를 떠나 당시 갓 세상에 나온 한겨레신문사에서 일간지 기자라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남북 관계를 비롯해 나라 바깥소식을 두루 다루는 ‘민족국제부’에서 첫 발짝을 떼었고 이후 사회부와 정치부, 도쿄 특파원을 거친 한승동 회원은 올해로 8년째 문화부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언협 시절 품고 살았다는 확신이나 희망이 2014년을 살아가고 있는 지금의 한승동 회원에게는 얼마큼이나 남아 있을까?
그 시절에 비하면 저 자신은 특별히 변한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그럴진 모르겠네요. 제 초심은 변하지 않았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언론사에서 일하며 설정한 가장 큰 목표는 직업으로서의 기자만이 아니라 사회와 민족 문제를 고민하고 그것을 푸는데 보탬이 될 수 있는 기자가 되자는 것이거든요. 그 때문에 기자가 되려 했고요. 아직 우리가 사는 사회가 바라는 대로 바뀌지 않았으니, 제 초심을 끝까지 유지해 가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기도 하죠.
치열했던 시간들을 온몸으로 통과해 온 언론인 한승동 회원이 보는 현재의 언론은 어떤 모습일까? 잠시 생각에 잠기던 한승동 회원은 살짝 높아진 목소리로 다시 말을 시작했다.
지금 언론사들은 이윤 극대화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일반 사기업과 다를 바가 없어요. 언론의 본래 사명인 공익적 기능은 극소화된 반면 이윤을 추구하는 사기업적 기능은 극대화됐어요. 그러니 권력에 종속되고 아부하고 편승하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쉬워진 시대가 됐어요.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이익’이니 이익이 된다면 권력과 얼마든지 타협하는 거죠.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기득권 체제에 그렇게 언론인들이 투항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전선이 있어야 투항이라는 말도 할 수 있지, 이건 그냥 ‘삼투’라고 불러야겠죠. 기득권체제와 싸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가 체제의 일부가 되고 주체가 되어 버린 셈이니까요.
한승동 회원은 언론인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는 말에 이렇게 얘기했다.
좋은 기자가 되려면 지금의 언론이 하는 것과 반대로 하면 됩니다. (웃음) 개인적인 이익을 앞세우는 쪽으로 체제와 타협해선 안 되겠지요. 무엇이 자신에게 이익이 되느냐를 가장 큰 기준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좋은 기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언론사, 즉 보도기관은 특정 계층이나 계급이 아니라 세상 전체의 이익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기관이에요.
언론개혁운동은 권력자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의심하고 감시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필요할 땐 저항도 해야 하고요. 그 저항을 위한 판단 기준을 날카롭게 벼리기 위해선 늘 공부하고 옳고 그른 것을 판별하고 행동하는 용기가 필요하겠죠. 물론 내가 그런 기자라는 얘길 하고 있는 건 절대 아닙니다. (웃음)
어느덧 인터뷰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어 민언련 회원 인터뷰 ‘공식 질문’이라 할 수 있는 물음을 던졌다. 회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
각자가 선택한 길을 열심히 재미있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거창한 ‘운동’을 꿈꾸기 전에 자기 일상생활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운동을 추구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이 하나가 되는 상태가 가장 좋은 거죠. 민언련 역시 단시간 내에 성과를 내려고 조급해하지 말고 재미있게 일상 속에서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을 벌였으면 해요. 그래야 힘들어도 견뎌 낼 수 있어요. ‘삶의 방식으로서의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한겨레신문사를 나서니 마법의 궁전에서 팍팍한 현실 속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잔뜩 찌푸려 희끄무레해진 하늘에서는 찬 빗물마저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한승동 회원이 들려준 이야기들 가운데 몇몇 낱말들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일상’, ‘운동’, ‘삶’, ‘재밌게’, ‘꾸준히’ 등등.
알고 보니 적들과 싸우는 것만이 운동이 아니었다. 우리 자신의 생활을 어떻게든 삶과 가까운 방식으로 조금씩 만들어 가는 것이 어쩌면 모든 운동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삶과 운동을 하나로 만들 수 있을까? 한승동 회원은 자기만의 방식을 터득한 것처럼 보였다. 목덜미에 떨어지는 차가운 빗방울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나만의 방식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