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정말로 '슬기로운' 해법을 찾아서 (2014년 4_5호)
등록 2014.05.27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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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슬기로운' 해법을 찾아서

슬기로운 해법 : 태준식 감독 l 한국 l 2014 l 다큐멘터리 l 94분


전다은 회원 l ekdms302@hanmail.net



122%.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매일 보는 신문 기사 스크랩은 딱 이만큼 확대되어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슬기로운 해법>에 선뜻 출연해 준 옛 삼성 직원이 말한 내용이다. 기사 스크랩의 물리적 흔적을 지우기 위해 여러 번의 복사와 수정을 거치고 OHP필름까지 부착하는 매일 매일의 전 과정. 그녀는 이건희 회장이 무섭게 느껴졌다고 했다. 이 장면을 보며 관객인 나 또한 공포를 느꼈다. 이렇게 매일 올라가는 신문 스크랩은 언론사들의 경영에 큰 영향을 끼치는 첫 번째 자료로 사용된다. 


실제로 영화는 삼성 비자금 폭로를 보도한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이 이후 재정난에 시달리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그만큼 삼성의 언론장악력은 막대하다. 언론들은 영화 속 김민기 교수의 말처럼 “알아서 기게” 된다.


지난 4월 30일 광화문 인디스페이스에서 <슬기로운 해법>의 시사회가 열렸다.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공동관람 행사로 내게 영화를 볼 기회를 주었다. 영화는 우리가 매일 보는 기사들의 상당수가 독자들이 아닌 저 위 어딘가에 군림하는 자본권력과 정치권력을 바라보며 쓰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최근 세월호 참사에서 여실히 드러난 대한민국 전반의 ‘위를 바라보는 시스템’이 언론에도 적용된다. 사실 새로울 것도 없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언론은 영화 속 정연주 전 KBS 사장의 말처럼 ‘광고 찌라시’가 된 지 오래다. 독자들은 ‘위’를 향해 쓰인 기사들을 자신들의 알권리를 위해 쓰인 기사들로 착각하며 읽는다.


2012년 태풍 ‘카눈’이 덮쳤을 당시 조선일보 1면에 나왔던 해운대 앞 바다 사진이 사실은 몇 년 전 태풍 ‘모라꽃’이 왔을 때의 사진이었든, 2009년 중앙일보가 철도파업 때문에 여학생이 대학 면접을 보지 못했다고 보도했던 것이 사실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든, 이미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해운대의 커다란 파도는 이미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됐고, 철도파업은 노조원 200명의 해고를 불러온 뒤였다. 하지만 오보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신문도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정말 심각한 문제는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들의 숱한 오보들이 몇 cm의 조그만 박스 기사로 정정보도가 되면 용서받는다는 것이다. 


2003년 뉴욕타임스의 제임스 블레어 기자가 인터뷰기사를 날조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 신문이 보여준 태도는 언론의 품격이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뉴욕타임스는 1면 톱기사 뿐 아니라 신문의 4면을 모두 이 사건에 대한 해명과 조사 결과, 사과로 채웠다. 이 뿐 아니라 그동안 해당 기자가 써온 모든 기사들을 조사하고 사실여부를 재차 확인해 1주일간 기사를 실었다. 이러한 뉴욕타임스와 한국의 보수언론들을 같은 ‘신문’으로 묶기도 어쩐지 미안해진다.



한국은 하나의 전쟁터다. 어딜 가나 진영논리가 모든 사안을 뒤덮어버린다. 언론은 그 정점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선 앞 뒤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론의 ‘품격’은 멍멍이에게 줘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언론의 현 상황을 비판하는 이 영화 또한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커다란 맹점이다. 흔히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표현하는 곳에서도 규칙은 지켜져야 한다. 언론은 언론다워야 한다는 것, 영화는 영화다워야 한다는 것. 그런 면에서 <슬기로운 해법>은 아쉬운 점이 많다. 따분한 선악구도를 전제로 하면 작품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홍세화, 정연주, 주진우 등 이른바 ‘진보적’ 언론인들과의 인터뷰도 좋지만  그들이 보수 언론에 일방적으로 가하는 ‘뒷담화’가 주가 되면 곤란하다. 


영화 말미의 삼성언론상 시상식 장면과 YTN 해직 언론인들의 국토순례 장면의 대비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어 좋았다. 같은 ‘기자’라는 직함 위에서 진실을 전하겠다는 사명감으로 일했을 이들의 현재 모습은 너무나도 다르다. 삼성언론상을 받은 기자는 멀끔한 정장을 입고 스테이크를 썰며 와인을 마신다. YTN 해직 기자는 조그만 깃발을 배낭에 꽂고 투쟁의 길을 땀으로 걷는다. 사장의 낙하산 인사를 막다가 해직당한 그는 상은커녕 기자라는 직함이 적힌 명함도 잃었다. 


여러 가지 아쉬움이 있음에도 이 영화를 추천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현 시대 언론의 문제점을 매 시간 목격하면서도 정작 우리에겐 멈추어 응시할 수 있는, 멈추어 회고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영화를 통해, 90분간 이 문제를 바라보자. 그러면 태준식 감독의 말처럼 ‘슬기롭고 지혜로운 대안’이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