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따뜻함을 일구다 - 김은주 회원 (2014년 7호)
등록 2014.07.28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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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따뜻함을 일구다


인터뷰 정리 : 박병학 활동가




‘마포희망나눔’에서 일한다는 김은주 회원을 만나기로 한 날, 아침부터 푹푹 찌는 날씨 때문인지 어느 순간 마음속 무언가가 푹 꺾였다. 마음이 그래 버리니 몸도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머리와 가슴, 허리를 따로따로 엇갈리게 해 칼을 꽂는 마술 상자에 갇힌 듯 온몸이 어긋나는 느낌에 나는 민언련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오늘 반차를 쓰겠다고 말해 버렸다. 김은주 회원과는 마포구청역 가까이에 있는 마포희망나눔 사무실에서 12시에 만나기로 했다. 한강에라도 가서 펑펑 울고 싶었던 그날 마침 김은주 회원을 만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인터뷰를 끝내고 내 몸이 아닌 것만 같은 몸을 질질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알게 되었다.




김은주 회원이 민언련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4년 광주에서였다. 


“그때는 민언련이 아니라 언협(민주언론운동협의회)이라는 이름이었죠. 뱃속에 애가 있는 채로 광주 언협 사무실에 처음 갔는데 거기 있던 사람들이 저를 다들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거예요. ‘저 사람이 활동을 오래 할 수 있을까?’ (웃음) 그렇게 광주 언협 활동을 시작했고 신문모니터분과 분과장까지 했어요.”


광주 민언련에서 2년 동안 지냈던 김은주 회원은 서울로 집을 옮기며 새롭게 민언련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신문분과 분과장은 따로 있었고 김은주 회원은 분과의 총무로 활동했지만 분과장이 워낙 바빴던 탓에 분과원들 챙기는 일은 김은주 회원이 도맡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총무를 거쳐 2000년대 초반까지 신문분과 분과장도 했었어요.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때도 신문분과가 민언련의 핵심이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분과모임 하고 매주 보고서를 썼죠. 대학생들이 주축이긴 했지만 직장인들도 꾸준히 참여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시민들이 언론개혁 운동에 참여하는 바람직한 모델이었던 것 같아요.”


보고서를 매주? 2014년 현재 민언련 신문분과는 매주 모여 한 달에 한 편씩 보고서를 쓴다. 먹고사는 일에만 매달려도 살기 빠듯한 시대에 일주일마다 한 번씩 시간을 내서 신문들을 두루 살피고, 저마다의 생각과 고민을 모아 보고서 한 편을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신문분과 친구들과 가까이 지내는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보고서를 일주일에 한 편씩 써 내던 시절이 있었다니!


“네. 그땐 보고서를 매주 썼어요. 굉장히 오랫동안 그랬죠. 선거가 있을 때마다 선거모니터 보고서도 항상 냈고요. 근데 아무래도 쭉 연결해서 봐야 하는 중요한 사안들이 있잖아요. 그리고 이런저런 다른 이유들 때문에 언젠가부터 2주에 한 편씩 쓰는 리듬으로 바뀌었는데, 그러다 지금까지 오게 된 게 아닌가 싶어요.”



김은주 회원이 기억하는 신문분과는 ‘끈끈함’이었다. 


“취직하면 대부분 분과를 졸업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발길을 끊진 않았고요. 직장인 선배들이 자주 찾아와 신입 분과원들 교육도 해 주고, 모니터에 참여도 하고, 심지어 분과장이나 주요 부서장을 맡기도 했고, 분과 생일잔치 때는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엠티에 같이 가기도 했어요. 사실 그게 취직한 사람들한테는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런데 정말 분과원들이든 OB들이든 함께 재미있게 지냈던 것 같아요. 끈끈하다고 해야 하나? 말로 표현은 안 했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 같은 게 있었죠. 언론운동에 대한 신념도 다들 강했고요. 뒤풀이도 분과 모임 있을 때마다 매번 했어요. 뒤풀이를 통해 우애를 다졌다고 할 수 있죠. (웃음) 5~6년 이상 활동하는 장기회원이 많았다는 게 당시 신문분과의 특징이자 자랑이었어요.”



신문분과에서 활동하던 김은주 회원은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민언련과 한 식구(?)가 되어 갔고 결국 ‘협동사무처장’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민언련 사무처에서 먼저 제게 협동사무처장을 해 보지 않겠냐고 제안했어요. 제가 서울 민언련에서만 10년을 있었으니 아마 오래된 회원에 대한 예우가 아니었을까요? (웃음) 또 제가 굉장히 많은 회원들을 겪어 보기도 했으니 그런 부분들을 배려해 준 것도 있을 거예요. 그리고 언론보도 관련 토론회가 그때는 지금보다 더 많았었는데 거기 민언련 대표로 나가서 이야기하려면 직함 같은 게 필요했어요. (웃음)”


그렇게 2005년까지 민언련 신문분과원이자 협동사무처장으로 활동한 김은주 회원은 이후 민언련을 떠나 다른 길을 더듬어 보기 시작한다. 


“2000년대 초반에 안티조선 운동을 되게 열심히 했어요. 시민들도 많이 참여했었죠. 그런데 그런 운동을 해도 여전히 사람들이 조선일보를 계속 찾는 걸 보면서, 언론개혁운동도 좋지만 일단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과 의식을 하나로 만들어 일상 속 작은 부분부터 변화시키도록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지역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김은주 회원은 민언련을 그만둔 뒤 ‘성미산 마을’의 생활협동조합에서 일을 하며 지역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지역운동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도 진학하게 된다.


“지역운동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는데 아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공부를 체계적으로 해 보고 싶어 사회복지학과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우리가 ‘운동’이란 걸 하는 이유는 사람이 존중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잖아요. 근데 운동을 하다 보면 마음이 강퍅해지기도 하고 사람을 도구로 보기도 하는 일이 생기더라고요. 사회복지학은 사람을 그 자체로 인정해 주면서 그 사람의 가치가 온전히 꽃피도록 하는 학문이라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더 좋아하게 됐어요.”


해외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잠시 외국에 가서 살았던 김은주 회원은 2013년 초에 한국으로 돌아와 대학원을 마저 마치고 마포희망나눔에서 새롭게 지역운동을 시작한다.


“제가 민언련에 있을 때는 삶이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잘 몰랐어요. 사회 제도나 정치를 바꾸면 다 달라지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생존’ 자체가 버거운 사람들도 있다는 걸 지역에 관심을 두며 알게 됐어요. 희망나눔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처음 방문한 곳이 너무나 힘들게 살아가시는 할아버지 댁이었는데요. 문을 열면 고약한 냄새가 나는 방에서 가족도 없이 혼자 사시는 걸 보고,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처음 알고 정말 큰 충격을 받았어요. 망원유수지 근처에는 40년쯤 된 쪽방 같은 주거지역도 있는데 거기서 혼자 사시는 할머니들을 보면서도 가슴이 너무 아팠어요. 그분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데...... 또 당장 생존이 어려운 분들도 있지만 마음이 어려운 사람들도 있고, 사회 제도나 정치의 변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다양한 어려움들이 있어요. 그런 어려움들을 같이 나누면서 지역에서 서로 돕는 구조를 만들어 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김은주 회원이 ‘나눔팀장’으로 몸담고 있는 마포희망나눔은 무엇을 하는 단체일까? 


“저희가 주로 하는 게 홀몸 어르신들에게 주거, 수급 등 기타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 드리는 일이에요. 이를테면 지역 주민들이 직접 만든 반찬을 지역 아이들이 어르신들께 전해 드리고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사업을 벌이는 거죠. 주는 사람들이 꼭 은혜를 베푸는 위치가 되는 건 아니고 서로 주고받으며 성장하기도 하거든요. 때로는 도움을 받았던 이가 도움을 주는 위치가 되기도 하고요. 그렇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려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해 나눔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나눔과 관련된 기관이나 단체를 그물망처럼 연결해서 서로 상승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저희가 하는 활동이에요.”


지금은 지역운동에 몸과 마음을 쏟고 있지만 김은주 회원은 한때 어엿한 민언련 일꾼이었다. 쓰레기장과 다를 것이 없는 요즈음의 언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이번에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를 보면서 정말로 언론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어요. 유신 정권 때부터 거의 30여 년 동안 언론개혁운동을 해 왔지만 바뀐 게 없잖아요. 종편의 기세도 무섭고. 조중동 판매부수도 여전히 많고. 어떻게 하면 언론을 바꿀 수 있을까. 어떤 것이 효율적이고 맞는 방향일까 하는 고민을 예전에는 정말 많이 했었고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해요. 근데 절대로 안 바뀌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언론개혁은 내릴 수 없는 깃발이기도 하잖아요? 언론 문제는 아직도 심각하지만 다양한 언론개혁 활동들이 진행되고 있는 건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이어 김은주 회원은 민언련이 언론개혁 활동을 어떻게 풀어내면 좋을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민언련 활동은 기본적으로 시민들이 주체가 돼서 하는 활동이잖아요. 시민들이 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민언련 내부에 있었으면 해요. 닥치는 사안들에 재빠르게 대응하려면 활동가들 중심으로 갈 수밖에 없겠지만 회원들이 다양한 형태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거든요. 그리고 민언련이 유신 정권 때의 언론개혁운동에서 출발한 거니까 그 시절 세대가 지니고 있는 결기와 그 이후 젊은 세대의 혈기를 연결해 서로의 장점들을 버무리면서 뭔가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몸도 마음도 힘든 날이어서 과연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싶었던 인터뷰를 어찌어찌 끝냈다. 푸근한 웃음을 짓는 김은주 회원과 악수를 나누고 바깥으로 나오니 땡볕이 무시무시하도록 온몸을 내리눌렀다. 집까지 또 언제 가나 하는 생각에 아득해졌지만 마음속에선 어긋난 것들이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사회제도나 정치가 사람살이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람에게는 다양한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김은주 회원의 말이 묘하게 위로가 됐다. 한강에 가서 펑펑 울지는 못했지만 김은주 회원 앞에서 한바탕 후련하게 울고 나온 것만 같았다. 


‘희망나눔’이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누구나 희망을 말하고 나눔을 말한다. 그러나 희망은 절망보다 눈에 띄지 않고, 나눔을 이루기엔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나 적다. 그럼에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따뜻한 무언가를 미련스럽도록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내게 가끔씩 힘이 될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하늘 깨끗한 가을이 오면 볕 좋은 곳에 퍼질러 앉아 김은주 회원과 술 한 잔 나눴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