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이계숙 수수팥떡가족사랑연대 사무국장
"자연건강법을 보급하는 ‘수수팥떡’, 아시나요?"
이계숙 이사의 인터뷰를 위해 ‘수수팥떡 가족사랑연대’(이하 ‘수수팥떡’) 사무실로 향했다. 사당동에 있는 아파트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먼저 반긴다. 푸릇푸릇한 상추와 갖은 채소들로 된 점심상이 차려져 있다. “점심 먼저 먹고 시작합시다” 이계숙 이사의 말에 냉큼 자리에 앉아 수저를 들었다. 밥 먹는 걸 찍을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이병국 회원이 셔터를 누른다. “진짜 먹으면 건강해질 것 같네요.” 자취 5년차, 채소가 그리운 이병국 회원의 감탄사다. ‘수수팥떡’ 가입하고, 오며 가며 밥먹으러 오라는 권유에 “남는 장사”라며 웃음이 터졌다. 함께 나누는 밥상. 그 속에 ‘수수팥떡’의 가치가 숨어있다. - 유민지 활동가
특이하다. “일상생활에서 니시식(式) 자연건강법을 실천하는 단체”? ‘수수팥떡 가족사랑연대’다. 이 단체의 사무국장이 이계숙 이사다. 오랜 회원으로, 민언련의 활동 현장에서 함께 했던 그가 2012년부터 민언련 이사가 됐다.
사실 ‘수수팥떡’은 나에게 낯선 단체가 아니다. 민언련에 들어왔을 때부터 ‘수수팥떡’과 민언련은 이미 특별한 관계였다. 당시에는 민언련 사무처도 밥을 해먹었는데, 밥상의 ‘자랑’이었던 김치는 매년 겨울 김장철에 ‘수수팥떡’과 민언련 활동가들이 담근 김장의 결과였다. 활동가가 된 후 맨 처음 김장을 담그던 날, 팔곡가루로 만든 풀과 산야초가 들어가는 김장양념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생새우와 생조기, 생갈치, 생굴... 민언련 밥상의 김치가 왜 맛있었는지를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또 있다. 둘째를 낳고 두 달여가 지났을 때 둘째 얼굴이 울긋불긋 해졌다. 태열이겠거니 가볍게 생각했는데, 온 몸으로 번졌다. 병원에 데리고 가자 의사는 ‘아토피’라고 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내가 전화한 곳이 ‘수수팥떡’이었다. 죽염수로 닦아주고 면소재의 헐렁한 옷을 입히는 등 여러 지침을 따르며 그 시간을 버텨냈다.
니시식(式) 자연건강법을 실천하는 ‘수수팥떡’
그럼에도, 난 ‘수수팥떡’이 “일생생활에서 니시식(式) 자연건강법을 실천하는 단체”라는 걸 이번 인터뷰를 통해 처음 알게 됐다. 자연건강법도 생소하고, ‘니시’식은 더 생소하다.
“일본에 니시 가츠조라는 사람이 있는데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대요. 17살에는 결핵에 걸려 스무 살을 못 넘길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동서고금의 의학과 건강법을 연구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니시식 자연건강법을 내놓은 거죠. 그런데 최민희 전 대표(민언련 전 대표, 현 국회의원)가 월간 『말』기자 시절 만났던 비전향장기수 선생님이 암에 걸렸다가 이 자연건강법으로 암을 고치는 걸 보고 이 건강법을 알려야겠다고 활동을 시작한 거죠”
‘수수팥떡’은 민언련 사무실에서 첫 발걸음을 뗐다. 수수팥떡이라는 이름은 옛적부터 우리 어머니들이 백일과 돌에 이웃들과 수수팥떡을 나눠먹은 것에서 따왔다고 한다. 양질의 단백질과 칼슘이 풍부한 수수와 소화가 잘 되도록 돕는 팥을 함께 빚은 떡을 이웃과 나누는 것에 담긴 우리 어머니들의 ‘지혜와 공동체 정신’을 배우고자 함이다.
“수수팥떡은 2000년에 만들어졌어요. 당시 민언련 사무총장이었던 최민희 전 대표가 만들었죠. 민언련 사무실 작은 회의실에 컴퓨터 한 대와 직원 한명으로 시작했어요. 그 직원이 제 친구 신라영 씨였죠. 당시에 저는 과외를 하고 있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자원봉사’하며 도왔던 게 저와 ‘수수팥떡’ 인연의 시작이에요.”
친구에 대한 ‘의리’ 하나로 뗐던 발걸음이 이계숙 이사의 삶을 바꿨다.
“저는 당시에 ‘최민희’가 누군지, ‘자연건강법’이 뭔지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냥 친구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만 있었죠. 그러면서 생활단식도 하게 되고, ‘수수팥떡’이 추구하는 바를 알아가게 된 거 같아요. 그쯤 ‘수수팥떡’이 충정로로 사무실을 옮겼고, 최민희 대표의 제안으로 정식으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렇게 16년이 흘러 지금은 ‘수수팥떡’ 사무국장이 됐다. 자연건강법을 알리는 주체가 된 것이다.
“자연건강법으로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자는 게 핵심이에요. 병원이나 약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지키는 걸 생활화하자는 거죠. 병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잖아요. 웬만한 집들도 집안에 아픈 사람 한명 생기면 금세 무너지고요. 그래서 자연건강법을 보급하고 확산하는 운동을 벌이는 거죠.”
이 말을 들으니 뭔가 정리가 된다. ‘웰빙(well-being)’이 ‘깨끗하고 몸에 좋은 음식을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수수팥떡’은 함께 건강하게 살아보자는 것이다.
‘수수팥떡’의 힘은 신뢰로 똘똘 뭉친 회원들
민언련 작은 회의실 컴퓨터 한 대로 시작한 ‘수수팥떡’은 현재 4만여 명의 인터넷 회원과 회비를 납부하는 800여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수수팥떡’을 아토피 단체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요. 2000년 초반에는 아토피라는 말조차도 생소했어요. 현대의학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고... 그 때 자연건강법을 아토피 아이들에게도 적용했어요. 아토피 아이들을 위한 강좌가 열리면 정말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이를 안고 강의를 들으러 오는 엄마들도 있었어요. 함께 울기도 많이 했고, 점점 좋아지는 아이들이 생겼죠.”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인터넷 게시판에는 문의 글이 쇄도했고, 최 대표가 방송에 출연한 날은 접속자가 몰려 서버가 다운되기도 했다.
“당시 최 대표 스케줄이 이른바 ‘장윤정 스케줄’이었어요. 자연건강법 강의를 위해 지방은 물론 작은 생협 단위까지 돌아다녔죠. 그러면서도 인터넷이 올라온 글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답글을 단다는 게 원칙이었어요. ‘감사합니다’라는 단 한마디라도 반드시 달자고요.”
그래서일까. ‘수수팥떡’에 대한 회원들의 충성도는 상당하다. 현재 수수팥떡은 회원들의 회비와 교육사업을 통한 수익으로 운영된다. 대표적인 게 생활단식 강좌다. 정원 35명의 강좌를 매달 진행하는데, 신청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회원 혹은 전 수강생의 추천이다.
“저희는 농담처럼 다단계라고 말해요. 한 사람이 생활단식에 참여해 상태가 좋아지면, 그걸 보고 다른 사람이 신청하고, 또 다음사람이 오면서 단식강좌가 이어지는 거죠.”
생활단식 강좌는 단식하는 법을 알려주는 ‘강의’에 만 머무르지 않는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라온 단식 후기에는 그동안의 ‘식탐’·‘소비’로 이뤄진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돌아보게 됐다는 글과 끝까지 힘을 준 ‘수수팥떡’ 활동가들에 대한 감사의 글이 올라와있다.
“단식 관리할 때는 머리가 쭈뼛쭈뼛 서요.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서 단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상태를 점검하거든요. 효소와 죽염, 물은 제대로 먹고 있는지, 어디 안 좋은 곳은 없는지 확인하는 거죠. 그 과정이 사실 굉장히 힘든데, 하다보면 저도 성장하는 걸 느껴요. 통화하다보면 수강생들의 삶이 함께 들어와요. 그들의 삶을 보면서 내 삶을 돌아보기도 하고, 또 ‘아픈 곳이 좋아졌다. 고맙다.’라는 문자로 힘을 받기도 하죠.”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것. 계속 싸울 수 있는 힘을 주고, 결국 승리해서 몸이 좋아지는 경험은 신뢰를 높이고, 이 신뢰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회원들이 운동을 확대시키고 있다.
‘수수팥떡’ 사무국장이 된지 4년차다. 단체 방향에 대한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자연건강법의 보급 단위를 넓히고자 해요. 지금까지 ‘아이와 엄마’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좀 더 다변화하는 거죠. 특히 가족의 형태도 바뀌고 있잖아요. 1인가구도 새로운 가족의 형태죠. 요즘은 1인가구들에게 자연건강법을 함께 보급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업들을 고민하고 있어요.”
민언련은 기본을 지킬 수 있는 나의 힘
“TV조선 같은 종편에서 연락이 와요. 건강 프로그램에 출연해 달라는 거죠. 절대 안하죠. 종편에 출연할 순 없잖아요. 내가 민언련 이산데….”
종편 중에서도 건강프로그램은 시청률이 꽤 나온다. 단체에 대한 홍보도 된다. 종편의 문제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민언련 이사’로서,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생활 밀착형 운동을 하면서도 큰 틀의 원칙들을 지킬 수 있는 것은 민언련 활동의 힘이기도 하다.
“민언련에서 캠페인을 하거나 투표 독려 활동을 한다고 하면 ‘수수팥떡’도 새벽에 일어나서 함께 했어요. 한 7년 정도 같은 건물 1,2층을 쓰고, 밥을 함께 해먹는 ‘식구’였죠. 그러면서 너무 자연스럽게 언론 문제에 대한 인식이 커졌죠. 나는 남 앞에 나서지 못하는데, 1인 시위도 했죠. 처음엔 서 있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는데 뜻을 계속 생각하다보니 중요한 일에 나서서 행동하는 내가 자랑스럽더라고요.”
생활밀착형 운동부터 언론 운동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걸어가는 이계숙 이사. 그의 길을 함께 걸어 갈 듬직한 동반지들이 더 많이 생겨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