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주절주절 이야기(2) - 기울어진 운동장, 프레임 전쟁
신태섭 전 상임대표·동의대 교수
지난 호에 주류 언론의 실체를 보여주는 키워드를 ‘정권의 시종’, ‘마녀사냥’, ‘기울어진 운동장’, ‘프레임 전쟁’ 네 가지로 꼽고, 앞의 두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그 뒷부분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매사를 기득권의 이익과 관점에서 편향되게 보도·해설하는 언론매체가 시청취 구독 점유율과 매출액에서 구조적으로 우세한 현상을 뜻합니다. 이런 현상은 87년 6월항쟁 이후 1988년 국민주 형식의 한겨레신문과 순복음교회의 국민일보, 1989년 통일교의 세계일보, 1990년 현대의 문화일보 창간, 1990년 한화의 경향신문 인수, 1991년 SBS 개국이 진행되면서 출현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라, 거짓과 훈육만 메아리치는 ‘절벽’이었죠. 기존 족벌신문과 새로 창간한 대기업·거대종교 신문이 ‘자본에 의한 언론통제’를 강화하면서 권경언 수평유착을 형성하고, 정권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방송과 손잡고, 독재시절 형성한 특권적인 소수 기득권층의 지배를 안정화시키려 한 것입니다.
당시 권경언 수평유착 세력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통해 6월항쟁을 6.29선언으로 뒤집고, ‘범죄와의 전쟁’ ‘보통사람의 시대’ ‘문민정부’를 연출하고, 대선 총선 지자체선거에서 여당후보를 띄우고 야당후보를 깎아내리는 편파보도를 지속했습니다. 기만과 왜곡의 프레이밍 전쟁을 공세적으로 벌인 것입니다. 동시에 <보도협조>라는 언론통제 시스템 운영, 1989년 7월 안기부의 한겨레신문 편집국 압수수색, 1990년 2월 노조를 용인하던 KBS 서영훈 사장 해임과 노조해결사 서기원 사장 낙하산 투척, 1990년 4월과 1992년 9월 KBS노조와 MBC 노조의 방송민주화 요구에 대한 무장경찰 투입 분쇄 등 군사독재 시절 있을 법한 흉포한 언론자유 탄압도 병행했습니다.
그 같은 시도들은 매우 광포하고 효과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소득·재산의 양극화와 대자본의 지배확대는 지금까지 순탄하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87년 6월항쟁으로 기대를 갖게 된 경제민주화와 상생의 희망은 절망이 되었습니다. 7·8·9월 노동자대투쟁으로 얻어진 분배개선은 기업지원을 위한 인플레정책과 빈부격차 심화로 도루묵이 되었구요. 지금 우리는 극소수 상위계층이 대부분의 경제적 과실을 향유하고, 절대 다수 국민은 일을 하면 할수록 더욱 더 곤궁해지는 최악의 상황, 인내의 한계치까지 도달했네요. 기득권 세력의 지배 확대와 심화는 경제 측면에서 아직까지는 완벽하게 성공한 상태인 듯합니다.
정치 측면에서는 실패와 성공의 널뛰기가 아직도 진행중입니다. 노태우·김영삼 정부가 만들고 계승한 권경언 수평유착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로의 정권교체와 이를 통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대를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잃어버린 10년’을 절치부심하던 기득권 세력은 심기일전 정권을 되찾고 재창출까지 성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나라당(새누리당)과 수구언론은 점증하는 양극화로 위기감을 갖게 된 유권자들을 ‘경제살리기’ 프레임으로 현혹하고(2007년), ‘경제민주화’와 ‘복지’의 거짓공약을 보태고(2012년), 상대에게는 시도 때도 없이 온갖 모욕과 폄훼를 가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절벽’에 가깝게 변형시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과감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시행했습니다. 민주정부 시절 권력의 통제로부터 자유롭던 공영 미디어들을 정권의 하수인으로 장악하고, 종편을 도입해 각종 특혜를 주면서 극우파시스트적 목소리를 키우고, 김대중 정부의 전국광통신망 설치의 부산물인 인터넷 공론장을 탄압과 제도개악을 통해 억압하고, 그것을 정부가 주도하는 불법선거운동의 공간으로 타락시킨 것입니다.
4대강사업으로 가뭄과 수해를 없앤다는 창조적(?) 논리를 앞세워 환경을 파괴하고 공공자산을 약탈한 것처럼, 법치와 고용창출 및 돈벼락을 내세운 초현실적 논리를 내세워 언론자유탄압과 언론장악 및 방송구조개악을 추진한 것이죠. 그리고 그 실체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허물고 그 위에 거짓선전의 토치카를 구축한 것입니다. 반면 박근혜 정부는 전혀 창조적이지 않습니다. 이명박 정부가 ‘절벽’에 가깝게 재정비한 ‘기울어진 운동장’을 계승하고, ‘절벽’에 가까운 게 아니라 아예 ‘절벽’ 자체가 되도록 무대포로 그 효용을 향유할 뿐이네요.
이러한 퇴행적이고 반역사적인 시도는 성공할 수 있을까요? 기득권 세력의 지배확대와 영속화라는 궁극 목적에서 볼 때 그것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그 실패의 로드맵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선거를 통해, 또는 구조적으로 공정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더 큰 국민적 저항을 통해 우리 국민이 그 시도를 좌절시키는 그림입니다. 다른 하나는 양극화가 한계치까지 진행돼 경제가 거덜나고 정치적 불안이 일상화되는 절망의 그림, 부자든 빈자든 난파선을 탈출한 검은 머리 미국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일상이 황폐화되는 공멸의 그림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전자의 길로 가야겠죠. 어떻게 해야 그 길로 갈 수 있을까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니 지혜 이전에, 솔로몬이 지녔던 권력을 국민의 손에 확보하는 게 우선이겠네요…. 국민이 ‘민주공화국’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민주적 정권교체의 지혜와 실천이 절실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