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호] [영화이야기] 작은 일에 대한 정성이 갖는 큰 힘, <역린>
등록 2015.10.08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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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작은 일에 대한 정성이 갖는 큰 힘, <역린>

 

 


최근 들어 정조를 다루는 대중 서사들이 그 어느 때보다 부쩍 눈에 띈다. ‘왜 이 시기에 정조일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당연할 만큼. 그 이유를 단 하나로 정리하려는 시도는 억지다. 그 이유들 중에 어떤 것들이 있나를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정조가 행했던 개혁 정치를 대중이 갈망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이 있다. 정조는 조선 이십 칠 명의 왕들 중에서 가장 좋은 통치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있다. 


 영화 <역린>(2014)을 만들고 나서 감독 이재규가 응한 인터뷰 기사(tenasia, 2014.5.23)에 의하면, 그는 역사적 인물 중 정조에 호기심이 닿았고 그 삶의 순간을 이야기하려고 했단다. 그러던 중에 그 이면의 것들이 강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이재규 감독은 바른 통치자라면 무릇 계급적으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관심을 보이고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그래서 자신의 영화에 정조를 선택했고 정유역변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풀었구나, 싶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잠시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재규 감독은 혹시 영화를 만들고자 정조라는 인물을 선택했고 정조에게서 만들어낼 수 있는 많은 이야기 거리를 살피다가 백성에게 정성을 다하는 통치철학을 중심에 두기로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영화가 만들어졌던 간에, 감독이 의도했던 아니던 간에, 관객이 몸담고 있는 시대적 상황은 영화 <역린>의 서사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작은 일에 정성을 기울여서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통치자 정조의 철학이 남달리 예민하게 읽힌다. 감동을 받게 만든다. 

 

정조 즉위 1년이 되던 해인 1777년, 7월 28일 정조의 거처인 존현각에 암살 자객이 침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영화는 정유역변이라고 불리는, 그 암살시도 사건이 발생한 날 하루 동안을 그린다. 암살은 노론계에서 살수(조정석)를 고용하고 궁 안에 오래 전부터 위장 잠입해 있거나 노론의 패거리인 상궁, 나인, 문지기 등의 협조를 받아 계획된다. 영화는 암살 시도가 실패한 밤 11시 경의 널부러진 자객 시신 장면에서 시작하여 20시간 전으로 되돌아가 정조(현빈)의 일상을 시간 단위로 순차적으로 보여주어 암살 실패까지를 담아내는 액자식 방식으로 플롯을 구조화했다. 그 플롯 속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김성령)의 정조에 대한 사랑과 우려, 측근 홍국영의 보필, 내시 상책(정재영)의 정성이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렇지만 그들의 힘은 미약하다. 자신을 적대시하는 노론계 정순왕후(한지민), 어영대장 구선복, 그리고 대다수의 신하들이 똘똘 뭉쳐서 이룬 거대한 권력은 번번이 정조의 정치적 행보를 방해한다. 정치적 행보를 방해할 뿐 아니라 목숨도 위협한다. 살수(조정석)를 협박 고용하여 밤 늦은 시각 정조의 침소에 투입시키기까지 한다. 이런 위험은 정조로 하여금 큰 것을 넘어뜨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했을 것이다. 기득권자들의 불공평한 세상을 바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혹시라도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협조한다면 그런 상황은 정조에게는 실존적으로는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조가 하고자 했던,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것(사소한 것)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일이었을 것이다.

 

영화의 전반과 마지막에 나오는 중용 23장의 경구는 어떤 관객들에게는 감동을 주기도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도 하는 메시지가 되었다지만, 또 어떤 관객들에게는 가르치려 든다고 비난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나오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중용 23장의 경구는, 그렇지만, 정조가 경연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삶을 살고 정치를 해야 하는지를 설파할 때 들려주었고, 또 다른 한 번은 살수로 키워지는 고아들을 풀어주러 직접 달려갔다가 돌아올 때 독백하는 장면에서 쓰인다. 혹자가 이야기하는 반복을 통한 설교라기 보다는, 정성과 변화라는 두 개념이 정조가 스스로를 늘 경계하는 통치철학의 핵심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구성이 아닐까 싶다.

 

 

 

영화 <역린>은 독특한 텍스트 구조를 갖는다. 이 영화는 극장 상영 당시 산만하다고 비난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정조 이야기라더니 정조 이야기는 별로 없다는 비난도 있었다고 들었다. 열거한 두 가지 종류의 비난은 이 영화의 하이퍼텍스트성 때문에 나오는 것 같다. 책이라고 한다면 한 페이지에 각주를 수십 개 달고 있는 모습이다. <역린>에서는 영화의 전통적인 순차적, 선형적 구조가 해체되어있다. 현재에서 과거로, 과거에서 다시 현재로 시간 이동을 할 때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해오던 관습에 기대지 않는다. 오히려 극중에 나오는 말을 하나의 접속점(node)으로 삼아 다른 텍스트로 넘어가는 방식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정조가 새벽에 선왕의 위패가 있는 혼전으로 가는 길에 보위하던 홍국영이 어영대장 구선복을 제거하라고 제안하는 말이 끝나면서 구선복이 군영에서 부하들을 호령하는 쇼트들이 10초 정도 보여졌다가 다시 정조와 홍국영의 쇼트로 돌아온다. 마치 구선복을 클릭하여 구선복에 관한 정보가 담긴 텍스트로 타고 넘어갔다가 다시 본문으로 돌아온 듯한 구조이다. 살수로 자란 을수가 15년 전을 회상할 때도 같은 방식이 나온다. 고아였던 자신이 광백(조재현)에게 잡혀서 살수집단에서 키워질 때 죽지말라면서 돌을 깎아 만든 징표를 준 의형 갑수를 생각하자 영화는 링크를 타고 현재의 성인이 되어있는 상책 갑수에게로 넘어온다. 광백이 요구하는 또 다른 암살을 을수가 거절하자 월혜를 빌미로 협박하는 장면에서도 그러하다. 월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던 과거의 장면으로 타고 넘어갔다가, 이어서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살해의 대상이 왕이라는 것을 알리는데, 초상화를 바라보는 을수의 시선 쇼트 다음 초상화 쇼트가 이어지고 정조의 목소리가 깔리면서 현재의 정조에게로, 홍국영과 대화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분절된 이야기들, 정보들을 종합해서 해독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이러한 방식의 비선형적인 구조는 관객의 독해 관습을 배반하므로 산만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관객이 능동적으로 탐색하고 개입한다면 다양한 해독을 즐길 수 있다. 정조의 이야기로 독해하거나, 정조와 상책의 이야기로, 상책의 이야기로, 혹은 살수인 을수와 갑수, 을수와 월혜의 이야기로 재구성해서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