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7월호] [회원인터뷰] 기타를 든 도망자, 마음의 빚을 갚고 있다 (박태희 회원)
등록 2016.06.3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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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_박태희]

기타를 든 도망자, 마음의 빚을 갚고 있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선 박태희 회원은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있던 김언경 사무처장과 민언련 활동가를 향해 ‘너무나 좋은 사람들’, ‘만나고 싶던 사람들’이라는 인사를 쏟아냈다. 오로지 ‘민언련 사람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윤도현밴드(YB, 이하 YB)의 베이스 기타 연주자인 동시에 민언련의 장기 후원자이기도 한 그는,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 역시 안다고 했다. 그렇기에 대신, 그곳에 서서 버텨주는 민언련과 같은 단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기쁘다고 했다. 그 마음은 후원으로 이어졌다. 실제 박태희 회원은 2002년 12월 첫 후원을 시작한 이래로 14년여 간 민언련과 함께했다. 그는 유명인사가 아닌 한 사람의 회원으로, 민언련 소식지 표지를 장식하게 된다는 점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 글: 배나은 활동가, 사진: 김윤섭 작가, 동행: 김언경 사무처장

 


1980년 5월 쯤이였나보다 라디오를 돌리다 우연히 북한 방송 주파수가 잡혔다. 북한 앵커는 소리 높여 광주를 지지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어린 그는 정말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의 사주로 이뤄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함께 라디오를 듣던 아버지에게 “광주에 간첩 놈들이 많네요. 다 때려잡아야 해요”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동조했다. 박태희 회원이 광주의 진실을 알게 된 것은 대학에 입학한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라디오 앞에서 했던 그 말들은 마음 한 구석에 남아 계속 그를 괴롭혔다.


20살. 그가 다니던 홍익공전은 재학생들과의 충분한 상의 없이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고 4년제 대학이 될 준비를 시작했다. 학생들의 데모가 시작됐다. 그는 친구들이 전경에게 맞을 때 돈을 벌기 위해 웨이터로 일했다. 또래 여자아이들이 사복경찰에 머리채를 잡혀 끌려갈 때, 기타연습을 하다 그 기타를 들고 도망쳤다. 그 순간 느꼈던 존재의 초라함은 부채의식이 됐다. 그는 이것을 ‘빚진 자의 마음’이라 표현했다.

 

참여사회 객원기자로 활동하며 민언련을 만나다

 

처음부터 민언련을 알았던 것은 아니다. 돈암동 616번지 달동네. 이불 속에서 부모님이 세 자녀의 등록금 문제로 속앓이 하시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던 그는, YB 활동 이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이 생기자 책을 사고, 옷을 사고, 운동을 배우고. 그러다 신문과 주간지를 사 읽기 시작했다. 당시 YB는 다음기획 소속이었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정태춘, 박은옥 등의 아티스트들도 이곳 소속이었다. 그들의 영향으로 한겨레를 집어 들게 됐다.

 


어느 날부터 한겨레21은 10주에 걸쳐 대한민국군의 베트남 양민 학살 실태 고발 특집 기사를 내놨다. 그 기사를 접하며 그간 막연하게 품고 있던 베트남전 대한 고정관념이 깨졌다. 이 경험은 2001년 YB 5집에 수록된 곡, ‘하노이의 별’에 그대로 담겼다. 해당 곡을 접한 소속사 동료 탁현민씨(성공회대 교수. 당시 미디어 영상담당자로 해당 기획사에서 근무했다)는 그에게 자신이 과거 간사로 활동했던 참여연대의 월간 회원소식지 ‘참여사회’ 기자직 활동을 권유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민희 당시 민언련 사무총장을 인터뷰하며 민언련을 알게 됐다. 이 만남은 곧바로 민언련 회원 가입으로 이어졌다. 실제 해당 인터뷰 기사 말미, 그는 “오늘 나는 민언련에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썼다.

 

여전히 ‘바람 앞의 촛불’인 박태희
음악과의 인연은 ‘학교에 때때로 만취해 등교했던’한 친구의 권유로 찾은 대학로에서 시작됐다. ‘착한 모범생’이었지만 속으로는 ‘착해지기 위해’ 스스로 자유를 박탈한 상황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던 불안정한 시기, 그는 친구를 따라 ‘신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유흥은 길지 않았다. 결국 그의 손에는 술잔이 아닌 기타가 남았다. 열아홉 살 박태희는 가식적인 착한 아이로 남은 대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의 결과 역시 스스로 책임지겠다 선언했다. 인생의 매우 주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홍익공전에서는 내내 통기타와 클래식 기타를 다뤘다. 해군군악대에서는 일렉트릭 기타를 연주했다. 그러나 군제대 후 새롭게 입학한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에서는 가능성을 믿고 베이스 기타를 선택했다. 늦게 시작한 만큼 그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이를 인정받아 ‘윤도현’ 솔로 앨범의 프로듀서였던 강호정 교수의 추천으로 공연 오디션에 참가했다. 실력은 한계가 있었음에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할 것 같다’는 이유로, ‘성실하고 착해 보인다’는 이유로 그는 멤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초반의 실력 부족은 괴로운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YB 2집’ 녹음 당시, 그가 간단한 베이스 연주를 계속 틀리자 보다 못한 프로듀서가 베이스 기타를 달라고 해 대신 녹음을 마쳐버리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시간당 돈을 지불하는 녹음실 규정 때문이었지만, 그는 울었다. 그러면서도 감사함을 담아 ‘포기하지 말고 물러서지 말자’고 다짐했다.


언제쯤 자신이 YB의 온전한 멤버로 합류되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밴드를 시작한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고 답했다. 그의 음악적 긴장감은 여전했다. 그는 ‘아픔을 잊으면 거만해 진다’며 이런 상황이 좋다 했다. YB에 처음 합류했을 때, 강호정 교수는 그를 향해, 고정멤버로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이번 앨범에만 합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며 “너는 바람 앞의 촛불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그 ‘바람 앞의 촛불’이라는 말이 참 좋다고, 늘 기억하고 긴장하며 노력할 것이라 했다.

 

5월 광주를 향한 헌시, ‘나는 나비’
박태희 회원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그의 음악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는 기타를 열심히 치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했다. 테크닉적인 노력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였을까. 단순히 음악적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세상을 알고 시대를 알고 그 속에서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음악하는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가 작사·작곡해 2006년 발매된 7집 수록곡 ‘나는 나비’는 5월 광주에 대한 개인적인 헌시다. 데모곡의 제목은 ‘붉은 5월’이었다. 이후 아내와 YB 맴버들의 조언에 따라 조금씩 수정되다가, 그가 5월 광주의 사람들을 ‘나비’로 은유하기로 결심하면서 지금의 형태를 지니게 됐다. 본래 7집에서 빠질 예정이었던 이 곡은 급작스런 윤도현의 권유로 막판에 앨범에 추가됐고, 지금은 YB의 대표곡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그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공연에서, 금남로에 앉은 광주 사람들 앞에서 이 곡을 불렀던 경험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시대를 알려고 노력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최대한 헌신하면, 결국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낙인이 된 소신
그러나 이 같은 소신은 때로는 ‘낙인’이 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신문과 방송을 소비하는 이들과 신문과 방송을 생산하는 이들이 바라보는 언론 문제는 다를 수 있다. 신문과 방송에 ‘등장’했던 그가 체감했던 언론 문제는 주로 ‘생존’과 관련된 것이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음악적 즐거움과 더불어 시대적 상황과 존재 이유에 대한 고민이 녹아든 YB의 음악에 대중은 깊은 공감과 호응을 보냈다. 이 시기를 전후 해 YB는 MBC가 주관한 남북예술인 평양공연과 조총련 산하 재일조선인 청년동맹이 주관한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1주년 기념 콘서트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상황도 변했다. TV, 라디오, 행사 섭외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미 출연이 약속된 프로그램에서는 ‘올 필요 없다’는 통보가 돌아왔다. 견뎌야 했지만, 사실 견디기 힘들었던 시간이 이어졌다.


보도를 통한 직접적인 공격도 이어졌다. 그나마 ‘밴드’라는 이름 뒤에 서 있을 수 있던 다른 멤버와 달리, 이미 노출되어 있던 ‘윤도현’은 언론의 조리돌림 대상이 됐다. 애국가 응원가의 상업성 문제부터 사생활 관련 보도까지. 문제적 보도를 내놓은 기자들의 이름은 언론사 그늘에 가려져 있던 반면, 윤도현은 홀로 얼굴을 드러낸 채 날아오는 돌을 맞으며 광장에 서 있어야 했다.

 

민언련에게 하고 싶은 말, “잘 버텨 달라”
이런 상황에서 민언련은 박태희 회원이 제대로 된 언론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나침반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한 개인이 모든 부분에서 전문가가 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알고 싶다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전문성 있는 건강한 시민단체 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그는 소식지에 실린 기존 회원 대상 회비 증액 요청 글을 보고 직접 사무처에 전화를 걸어 회비를 증액했다. 그때 일에 고마움을 표하자 오히려 그렇게 도와달라고 먼저 요청해줘서 고맙다고 답했다. 김언경 처장의 “이번 인터뷰 요청 전화조차 우리는 큰 맘 먹고 건 것이었다”, “참여연대에서는 공연도 해줬다는데 우리가 그동안 너무 소심했었나보다”는 농담에는, “맞아요. 그냥 편하게 부탁해주시면 돼요”라며 마음을 풀어주기도 했다. 민언련에 대한 아쉬운 점을 이야기해달라고 하니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민언련 강좌가 모두 저녁시간 대에 있는데, 오전이나 낮 시간대 강좌도 열렸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날자꾸나 민언련>의 표지 모델이 민언련 회원인 점이 참 좋다며, 지난호 소식지 표지모델과 그의 사연에 대한 소감도 이야기했다. <날자꾸나 민언련>을 은근히 연습실이나 기획사 사무실에 툭 놓아서 다른 이들이 읽어보게 권하기도 한다는 말에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인터뷰 말미, 민언련에 바라는 점을 묻자 “잘 버텨 달라”고 답하기도 했다.

 

자꾸만 마음의 빚을 갚고 싶다고, 대신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맙다고만 하는 박태희 회원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민언련 활동가로서 오히려 ‘마음의 빚’이 생겼다. 이 빚을 갚기 위해 그가 기대하는 그대로 민언련이 보다 건강하고 전문성 높은 언론운동 단체가 되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도록, 활동가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