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10월호] [영화이야기] 21세기 소년이 바라보는 20세기의 여자들
등록 2017.09.25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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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유년기를 지나왔습니다. 그때의 성장통을 거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풋풋한 첫사랑, 목적 없는 반항, 그리고 자유에 대한 갈망까지, 사춘기란 한 단어로 정의하기에는 꽤나 묵직하고 의미 있는 시간입니다. 나름의 방식대로 우리는 그 시간을 견더내었고, 그 성장의 과정을 기억합니다. 마이크 밀스의 신작 <우리의 20세기>는 1979년, 감독 스스로가 자신의 유년시절을 돌아본 자전적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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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배경은 1979년입니다. 1979년은 묘한 시기입니다. 히피와 펑크가 종말하고 지미 카터 대통령이 역사의 전환을 이야기했던 시점이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지배하는 시대정신인 신자유주의가 태동한 때입니다. 싱글맘인 도로시아는 자신의 오래된 집에서 자유분방한 아티스트 애비와 함께 삽니다. 일종의 ‘룸쉐어’죠. 도로시아의 아들 제이미와 그의 오랜 친구인 줄리도 이 집에서 생활합니다. 15살 제이미가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영화는 제이미의 성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관객은 제이미의 성장통을 보듬는 여성 3인의 성장을 함께 지켜보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20세기>는 지금도 첨예한 이슈 중 하나인 젠더를 관통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를 탄압하거나 그녀의 삶에 개입하는 남성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의 ‘성장’을 공유하고 바라볼 뿐이죠. 

 

세 인물의 삶은 평탄하지 않습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싱글맘이자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50대 도로시아, 엄마가 먹은 피임약으로 인해 자궁암에 걸린 20대 애비, 일찍 성에 눈을 떴지만 남성들의 일방적인 성행위에 사랑을 두려워하게 된 10대 줄리. 셋 모두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결핍과 아픔을 지녔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방식과 가치관을 고수하며 살아가지만 행복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엄마는 행복해?’라는 아들 제이미의 물음에 “우울하게 만드는 질문 따위는 하지 마”라고 잘라 말하는 도로시아에게서 당당하고 ‘시크’하지만 깊은 내면의 우울을 지닌 현대인이 오버랩되기도 합니다. 이렇듯 감독이 돌아간 1979년은 한 소년의 유년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이미 주변의 세 여성의 성장기이자 1979년이 결정한 지금 우리의 자서전이기도 한 거죠. 영화 속 인물들은 지금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삶의 중요한 순간을 교차하고 부딪히면서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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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단순히 요약하자면, 세 여성은 모두 나름의 성장을 이뤄 갑니다. 영화는 결핍을 극복하는 여성 캐릭터들의 면면을 입체적으로 그려냅니다. 영화는 주인공인 제이미의 시선으로 바로 그 성장의 이야기를 연결합니다. 제이미는 진부한 남성 주인공들과 달리 상황을 주도하지 않습니다. 여자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남성으로서의 우월감은 이 영화에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성장통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면서 그녀들과 ‘살아갈’ 뿐이죠. 그렇기에 영화 <우리의 20세기>에는 여성에 개입하는 어떠한 남성 인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자의 운명 속에서 스스로 각성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들, 그리고 함께 사는 남성이 존재할 뿐입니다. 영화의 원제 <20세기 여인들>은 함께 사는 소년 제이미의 시선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영화 속 배경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영화 속 도로시아는 끊임없이 자신의 오래된 집을 수리합니다. 1904년에 지어져 20세기를 관통한 집. 그 집을 수리하며 도로시아는 세입자들은 물론, 다양한 사람들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즐깁니다. 그렇게 오래된 집은 다양한 색감으로 채워집니다. 인생을 결국 배워서가 아니라 살아봐야 한다는 것을. 남의 인생에 섣불리 훈수둘 수 없다는 것을. 다양한 색깔들이 만나서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사실을. 1979년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집에서, 우리는 목도할 수 있습니다. 저들의 저녁식사에 초대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재홍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