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호] [회원인터뷰] 진 피디와 이 기자가 꼬박꼬박 파업해 온 이유 (진정회 회원, 이철호 회원)
등록 2017.11.08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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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자꾸나, 민언련> 회비 납부자 명단을 보면 ‘진정회 이철호’처럼 이름이 함께 소개되는 회원이 있다. 주로 같은 집에 사는 부부나 친구인 경우다. 소식지 발송비용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에 ‘같이 사는 회원’을 묶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진정회·이철호 회원은 부부다. 그리고 KBS 피디와 기자다. 두 회원의 일터인 KBS는 지난 9월 4일부터 ‘고대영 사장 퇴진과 공정방송 쟁취’ 등을 요구하며 총파업을 벌이고 있다. 진정회 회원은 KBS 새노조 집행부로 파업에 열심이다. 영화 <공범자들>을 통해 알려졌듯이 ‘이명박근혜’ 정권 시절 공영방송 구성원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이철호 회원은 지난 2012년 당시 KBS 김인규 사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KBS 새노조의 ‘95일 파업’ 당시 집행부였다. 이들 부부는 왜 번갈아 가며 노조 집행부로 활동하고 2년마다 벌어진 파업에 꼬박꼬박 참여했을까. 파업이 한창이던 지난 10월 12일 여의도 KBS 새노조 사무실에서 진 피디와 이 기자를 만나 이들이 꾸준하게 파업에 참여한 이유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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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 짚어 ‘탄압’이라고 하기 애매한 일들의 반복

진정회 회원은 현재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이하 ‘KBS 새노조’) 집행부로 일하고 있다. 조합원 집회를 비롯해 파업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 매일의 업무다. 아침에 아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새노조 사무실로 출근해 조합원 집회를 진행한 후, 오후에는 일인시위나 기자회견을 한다. 그리고 다음 날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것이 주요 일과다. 이철호 회원은 ‘단순 참가자’로 집회에 결합하고 있다. 2012년에는 이철호 회원이 새노조 집행부였다. 그래서 파업 중에 집행부가 바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육아는 이철호 회원이 주로 담당하고 있다고. 

 

‘이명박근혜’ 시절 KBS는 추락했다. 둘은 추락에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무엇이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짜증스러운 일을 겪기도 했다. 2009년 가을, 두 회원이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다. 이철호 회원은 신혼집을 알아보던 중 한 선배로부터 ‘지역 발령이 날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다. 결혼식(11월 28일) 날짜가 한 달도 남지 않은 11월 1일 충주로 갔다. 

 

통상 KBS는 3월에 인사이동을 해왔다. 갑작스럽고 이상한 지역발령이었다. KBS 기자들은 신입직원이라면 누구나 지역 순환 근무를 거친다. 그런데 이철호 회원은 2006년 3월 경력직 기자로 입사했다. 함께 입사한 경력직 기자들이 ‘지역 순환 근무는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회사에 물었다. 이전까지 경력 기자 자체가 전례가 없는 제도였기에 회사는 ‘원하는 사람은 지역 근무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갑자기 충주로 발령을 받았다. 발령 사실도 신혼집을 구하다 알았다. 결혼기념 사진은 날을 잡아 이철호 회원이 서울에 ‘올라와’ 촬영하고 다시 내려갔다. 진정회 회원은 살던 자취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그리고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예정된 지역 근무를 1년 앞당겨 신청했다. 6개월 후 진정회 회원이 청주로 발령을 받아 내려갔다. 청주에 뒤늦게 신혼집을 구했다. 이철호 회원은 6개월 동안 청주에서 충주로 출퇴근을 했다. 그리고 이철호 회원이 먼저 서울로 올라와 고시원을 구해서 지냈다. 그렇게 애매한 상태로 신혼생활을 했다. 그리고 6개월 후 진정회 회원이 서울로 올라왔다. 깨가 쏟아진다는 신혼을 회사 덕분에 애매한 형태로 보내야 했다. 물론, 수천 명이 일하는 조직에서 회사가 구성원의 결혼이라는 신상의 변화까지 세심하게 배려해 줄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뭐라고 말하기 애매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두번의 징계

그런데 지역발령 전 있었던 일을 보면 ‘이게 무언가’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이철호 회원은 지역 발령 얼마 전인 2009년 6월 ‘고대영 당시 보도국장과 김종률 보도본부장에 대한 신임투표를 강행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고대영 사장은 1년 전인 2008년 보도총괄팀장으로 전면에 등장했다. 고대영이 보도국장(보도총괄팀장)이 된 직후 발생한 용산 참사 보도에서 KBS는 유독 철거민의 폭력성을 부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국면을 거치며 80년대 이후로는 처음으로 KBS 기자들이 취재 현장에서 쫓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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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협회는 고대영 보도국장과 김종률 보도본부장에 대한 신임투표를 결의했다. 당시 기자협회장이 사퇴를 선언하고 나타나지 않는 등 우여곡절 끝에 투표를 진행했다. 투표 후 난데없이 이철호 회원을 포함해 10년 차 미만 기자 3명이 징계를 받았다. 왜 이들이 징계를 받았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기자협회 사무실을 비추던 CCTV에 개표 당시 사무실을 들락거렸던 기자 중에서 일부를 추렸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또한, 고대영은 보도총괄팀장이 된 후 <미디어포커스> 폐지에 반대하는 평기자들을 향해 ‘지방으로 유배시키겠다’고 겁박하곤 했다. 고대영이 술집에서 <미디어포커스> 폐지에 반대하던 후배 기자들의 멱살과 머리채를 잡았을 때가 지역 발령 1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이철호 회원은 <미디어포커스> 폐지에 반대했고, ‘<미디어포커스> 문을 닫고 나온’ 기자였다. 그리고 보도국장 불신임 투표의 ‘주동자로 보였기 때문에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징계를 받았다. 회사에 ‘찍혀서’ 지방으로 유배를 보낸 것 같기는 한데, 콕 짚어서 그것 때문에 부당한 인사를 한 것 아니냐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더욱 짜증을 불렀다. 

 

‘묻지마 해고’와 ‘스케이트장 근무’와 같은 MBC의 부당노동행위와 비교할 때 KBS는 세련된 방식으로 저항하는 구성원을 적절하게 ‘관리’해 온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한 조직이 아니란다. KBS는 이철호 회원이 겪은 경력 기자의 지역근무와 같이 예전에 없던 제도를 뜬금없이 실시했다. 새노조에서 문제라도 제기하면 새로 만든 없던 제도를 확대해 모두에게 적용해버리는 식이었다. 이철호 회원이 충주로 내려가는 날, 함께 입사한 다른 경력 기자들도 지역에 내려갔다. 그중 한 명은 이철호 회원처럼 결혼을 한달 앞두고 있었다.  

 

한편, 이철호 회원이 징계를 받아야 했던 보도국장 불신임 투표에는 보도국 기자 중 절반이 넘는 138명이 참여했다. 투표 참가자의 93%(129명)가 고대영 당시 보도국장을 불신임한다는 뜻을 밝혔다. 

 

고대영이 싫어 부서를 옮기다

이철호 회원은 1년간의 지역 근무를 마치고 사회2부 사건팀으로 발령이 났다. 사건팀 회식 자리에서 승진해 ‘보도본부장’이 된 고대영이 나타났다. 만취한 고대영이 이철호 회원을 부르더니 ‘지난날의 앙금을 잊자’고 말했다. 하지만 이철호 회원은 고대영 보도본부장이 싫어 PD들이 일하는 제작본부에 자원했다. 기자들은 잘 하지 않는 선택이었다. 기자로 일하고 싶어 방송국에 들어왔는데 굳이 기자로서의 삶을 중단할 별다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철호 회원은 기자협회에서 주는 ‘이달의 기자상’만 4번을 받은 실력을 인정받은 기자다. 그런데 소속을 옮길 정도로 고대영과 ‘고대영 보도본부’의 분위기가 싫었다.

 

옮겨 간 제작본부는 보도본부보다 제작 자율성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방송국에서 데스킹 과정을 여러 차례 밟아야 하는 보도국보다는 제작본부가 업무 자율성이 높은 편이라고 한다. <생생정보통>에서 ‘시선 600’이라는 시사 코너를 맡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홍대 청소노동자’ 등 보도본부에서 다루기 힘든 아이템을 방송하며 청량감을 맛보았다. 그러나 코너는 폐지되었고, <생생정보통>은 외주로 넘어갔다. 그리고 2012년 95일 파업 때 노조 집행부로 파업특보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정직 1월의 두 번째 징계를 받았다.

 

10년 동안 그를 지켜본 진정회 회원이 말한다. “원래 유쾌하고 가벼운 성격이었다. 지난 9년 동안 KBS에 절망하고 분노하면서 성격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리고 눈물도 많아졌다.” 이철호 회원은 한때 KBS를 대단한 조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KBS가 영향력을 잃어 오히려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한다. 그에게 지난 9년은 그만큼 견디기 힘든 시절이었다.

 

 

복직하면 새노조 집행부를 할 거야

2014년 5월 8일. 세월호 유가족이 영정을 든 채 KBS 본관을 찾은 날. 진정회 회원은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후배들이 단톡방에 긴급하게 공지를 올렸다. ‘지금 단원고 아이들 부모님들이 아이들 영정사진 들고 KBS 앞으로 왔어요. 선배님들 다 나오세요. 우리가 뭘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일단 부모님들과 함께 있어요.’ 2008년 8월 이후 ‘싸우는 현장’에 항상 함께 했지만, 그날은 못 갔다. 갈 수가 없었다. 임신 7개월째였다. 세월호 뉴스를 볼 때마다 경악스러웠고, KBS도 공범이라는 사실에 더욱 괴로웠다. 임신했으니 오늘은 빠지자. 안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참담했다. 내 자식 위한다고 자식 잃은 부모 외면한 것 같아 두고두고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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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KBS 새노조는 “억울한 생명이 속절없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 특보에서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를 축소하는데 급급한 행위는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악”이라며 길환영 사장 퇴진 투쟁에 돌입했다. 진정회 회원은 그 기간에 적극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게 마음에 빚으로 남았다. 이철호 회원에게 말했다. “복직하면 지금 못한 것 나중에 다 할 거야.”

 

 

‘공영방송 피디’가 되고 싶었다

진정회 회원은 피디가 되기 전 민언련 회원 활동을 무척 열심히 했다. 2006년에는 ‘올해의 모범회원 상’을 받기도 했다. 다양한 사회 참여 활동을 열심히 하다 민언련에 찾아왔다. 방송모니터위원회에서 방송을 열심히 봤다. 자연스럽게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챙겨봤다. MBC <PD수첩>을 비롯해 KBS의 <인물현대사>, <한국 사회를 말한다>의 애청자였다. 

 

당시 KBS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공영방송다웠다. 현대사의 여러 금기를 거침없이 건드렸다. 정치 권력·자본 권력·사법 권력까지 성역 없이 비판했다. 공영방송의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보며 내가 관심 있는 주제로 돈도 벌 수 있는 직업이 공영방송 피디라고 생각했다. 딱 2년만 준비하고 안 되면 다른 일 하자고 마음먹고 지원했다. 

 

2007년 공영방송 KBS 피디가 되었다.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KBS 피디저널리즘의 황금기였던 시절을 신입사원으로 보냈다. 회사가 자랑스러웠고, 훌륭한 프로그램을 뚝딱 만들어내는 선배들에게 존경의 눈빛을 가득 담아 보내는 교양국 ‘막내 피디’였다. 

 

피디가 되고 1년이 지났을 때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08년 8월 8일, 이날은 KBS 이사회에서 정연주 사장 해임안을 가결한 날이다. 사복경찰이 KBS에 들어와 이사회 개최를 반대하는 KBS 구성원들을 끌어냈다. 사랑했던 일터가 망가지기 시작했다. 무너지는 KBS를 9년째 지켜봤다. KBS의 몰락을 지켜보며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공영방송이 무력하고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도 믿기지 않았지만, 일부 선배들의 반응은 더욱 의아했다. 어떤 선배들은 ‘KBS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했다. 

 

동의할 수 없었다. KBS가 권력의 나팔수였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시사프로그램에도 채널을 고정했던 청소년 시절부터 피디를 준비하던 시절까지 지켜봤고, 막내 피디 시절에 경험한 KBS가 정상이라고, 정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2008년 8월 8일부터 KBS는 부끄러운 시절로 빠르게 퇴행했다.

 

 

내가 이러려고 피디가 되었나

정권이 낙점한 낙하산 사장은 조직을 뒤틀었다. 뉴라이트 성향 인사를 본부장 등 임원으로 임명하고, 팀제를 폐지하고 국·부장제를 복원해 수직적이고 관료주의적인 통제 시스템을 부활시켰다. 일선 피디와 기자를 제어하는 보수적인 중간·고급 간부의 숫자가 3배 이상 늘었다. 결재단계도 3~4단계에서 7~8단계로, 결재 소요 시간도 2~3배 늘어났다(이명박·박근혜 정권 시기 언론장악백서)

 

일상에서의 지난한 싸움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선배이기도 한 간부의 말과 제안을 곧이곧대로 듣지 못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선배의 지적을 듣고 ‘내가 이렇게 또 하나 배우네’하는 재미가 사라졌다. 프로그램을 잘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옳은 지적일 수도 있는데 속내를 의심해야만 하는 상황. 의심하는 자신을 보며 또 한 번 기분이 더러워지는 불쾌한 경험이 차곡차곡 쌓였다.

 

프로그램 생각만 해도 하루가 모자란 데 일터에서의 일상과 팀워크가 망가져 갔다. 아이템을 선택할 때부터 ‘윗선’과 실랑이를 하다 결국 피켓을 들고 성명서 쓰기를 되풀이했다. 반복되는 지난함은 ‘해도 안 된다’는 좌절을 불렀다. 피곤한 일을 만들지 말자는 패배감과 무력감이 켜켜이 쌓였다. ‘내가 이러려고 피디가 되었나’하는 자괴감도 느꼈다. 모두가 그랬다.

 

 

모든 파업이 좋은 파업이었다

2008년 KBS 노동조합은 정연주 사장 해임을 비롯한 이명박 정권의 KBS 장악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KBS가 공영방송이라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한 구성원들은 따로 ‘KBS 사원행동’을 꾸렸다. KBS 사원행동은 이후 2010년 1월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결성으로 이어진다. 기존 노동조합과 구별하기 위해 ‘새노조’라고 부른다. 현재 두 달째 고대영 사장 퇴진과 공영방송 회복을 위한 총파업을 벌이는 노조가 사원행동을 잇는 ‘새노조’다. 

 

새노조는 KBS 안에서 소수였지만 9년 동안 현장에서 꾸준하게 저항했다. 작은 일로 치부할 수 있는 일에도 성명서를 쓰고 피켓을 들었다. 저항은 공영방송다운 공영방송에서 일하고 싶은 피디나 기자라면 ‘업무처럼’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회사가 정상이었다면, 아니 공정방송 하겠다고 피켓 드는 시간에 프로그램에만 집중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다. 지난 9년이 내 인생에서 ‘잃어버린 9년’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무리도 아니다. 2010년, 2012년, 2014년까지 한해 걸러 파업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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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9년 동안 졌다. 모두 졌다. 그렇지만 ‘모든 파업이 좋은 파업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포함한 새노조 조합원들에게 파업은 공영방송을 다시 올바로 세워야한다는 의지를 다지는 단련의 장이었다는 교훈을 얻어서다. 파업에 졌어도 조합원들은 현장에 돌아가 다시 싸울 힘을 얻었다. 파업은 공영방송 피디와 기자로 제대로 일하는데 필요한 ‘체력’을 기르는 훌륭한 학교였다. 파업에 들어가기 전 올해 파업이 처음인 후배들에게 말했다. “공영방송에서 계속 일하려면 1년에 두 달 정도는 월급 못 받는 것 각오하면서 다녀야 한다”고. 

 

그래도 올해 파업은 지난 파업과는 다르다. 이길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언론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시민들의 공감대를 확인하고 나선 파업이어서 무척 든든하다. 2009년 발기인 50명으로 시작한 새노조는 파업을 반복하면서 조합원이 꾸준하게 늘었다. 올해 파업 중에도 조합원이 계속 늘어 조합원 2천 명을 돌파해 조합원이 가장 많은 다수(多數) 노동조합이 되었다. 공영방송 KBS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구성원이 더 많아졌다는 의미다.

 

 

돌마고에 함께 하는 시민들이 고맙다

2008년 시민들은 이명박 정부의 방송장악에 맞서 싸우는 공영방송 구성원들을 응원하기 위해 촛불을 들고 여의도 KBS와 MBC를 찾았다. 보도와 프로그램으로 시민들에게 신뢰를 얻었던 ‘그때의 공영방송’은 지킬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사실 올해는 9년 전 같은 반응은 아니다. 영화 <공범자들> 덕분에 공영방송 구성원들이 저항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주는 시민들도 있지만,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사람들도 많다. 

 

진정회 회원은 공영방송을 지키지 못한 결과가 우리 사회에 미친 해악이 너무 컸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이철호 회원은 최근 몇 년간은 KBS의 영향력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말했다. 

 

두 회원은 9년 동안 KBS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지난 시절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것이 파업하는 첫번 째 이유다. 파업하면서 지난 시절 KBS의 잘못을 되돌아봤다. 왜 시민들이 KBS에 실망했는지를 더욱 잘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9월 8일 유경근  416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이 ‘돌마고 파티’에서 한 공영방송 파업지지 발언이 계속 머리에 떠오른다.

 

“여러분들이 공정한 언론, 언론의 독립성을 쟁취하려고 이렇게 파업을 하겠다는데 왜, 지지할 수 없다는 시민들이 있을까요? 왜 그럴까요? 왜냐하면 망가져 버린 언론의 피해자는 여러분들이 아니라 바로 국민들, 예은이 아빠인 나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파업을 지지하는 건, 여러분들의 파업을 열심히 지지하는 건, 여러분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편하게 근무하라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또다시 죽고 싶지 않아서, 내가 언론 때문에 또 다른 고통을 받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여러분들 파업에 성공하고 공정언론을 따낸 이후에 어떻게 하실 겁니까? 

 

보이는 것 그대로 보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거짓과 위선과 모략, 그 책략까지 들여다보고 보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실 보도라고 하는 그 중립성 뒤에 숨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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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매주 ‘돌마고 파티’를 찾아주는 시민들을 보며 힘을 얻고, 무한한 고마움을 느낀다. 공영방송을 다시 국민의 방송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힘을 보태려는 그 마음 하나하나가 무척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파업을 꼭 이긴 후 공영방송다운 보도와 프로그램으로 보답하고 싶다. 공영방송을 되살릴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평가를 꼭 받고 싶은 마음이다. 파업 승리는 단순하게 9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고대영 사장을 쫓아내도 KBS 내부에 얼룩처럼 눌어붙어 있는 적폐를 치우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 어쩌면 ‘고대영 사장 퇴진’은 구석구석의 적폐를 치우는 것보다 쉬운 일일지도 모른다. 

 

파업의 1차 목표인 ‘고대영 사장 퇴진’을 달성한 후 현장에 복귀하면 그때부터 현장에서 또 다른 싸움이 벌어질 것이다. 작은 싸움 하나하나를 모두 이겨야 KBS를 정상화시킬 수 있다. 고대영 사장만 나가게 하는 정도 가지고는 KBS를 정상화할 수 없어서다. 9년 동안 누적된 적폐를 모두 치워야 한다. 고대영 퇴진 이후 펼쳐질 일상에서의 작은 싸움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민언련의 오랜 회원 진정회 피디와 이철호 기자가 공영방송 KBS를 국민의 품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 이들의 투쟁은 승리해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공영방송 KBS는 국민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과 권력에 주눅 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약자의 눈으로 취재하고 보도하는 뉴스를 공영방송 KBS의 저녁 종합뉴스에서 만나고 싶다. 시청률과 광고수입에 얽매이지 않고 시청자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우리 사회에 필요한 화두를 던지면서 시민들의 인식의 폭을 넓히는 프로그램도 더욱 풍성해져야 한다. 

 

언젠가 민주시민언론상 시상식에서 진정회 회원과 이철호 회원을 만나면 좋겠다. 그때 상패에 한 줄 더 얹어주고 싶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정권에 장악되었던 공영방송 KBS를 국민의 품으로 돌리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다시 한번 두 회원의 파업을 응원한다.

 

박제선 홍보부장 사진 박제선·KBS 새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