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호] [책이야기] 여남, 성숙한 도반으로 나서기 위해 <내 안의 가부장>
등록 2019.05.2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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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남, 성숙한 도반으로 나서기 위해

: 시드라 레비 스톤, <내 안의 가부장>(백윤영미/이정규 옮김, 사우)

손목 욱신거리는 게 오래 간다. 예전엔 하루 이틀이면 가라앉던 게 사흘이 지나도 여전하다. 날이 갈수록 통증은 심해 간다. 마침 오후 시간에 여유가 있어 한의원에 들렀다. 침으로라도 다스려보자는 심산이었다. 이름을 적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의원에서 접수받는 분이, 오랜만이라며 '오늘은 어디가 편찮으세요?'라며 묻는다.


 손목 쪽이 사흘째 통증이 있다고 하자, 정형외과는 들렀느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그냥 이쪽으로 왔다고 하자 먼저 정형외과 가서 사진을 찍어 보란다. 거기서도 치료해 줄 터이니, 일단 정형외과 들러보고 낫지 않으면 다시 오란다. 뼈 쪽 이상을 먼저 보라는 걸로 이해했다. 자연스런 협진이로군, 하면서 한의원을 나와 정형외과로 갔다.

 병원은 붐볐다. 촌로들은 여기저기 통증을 호소했고 한 명뿐인 의사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분주했다. 한참을 기다린 뒤에야 의사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프다는 손을 여기저기 만지며 '여긴 어때요? 여기는요?'라며 촉진을 했다. 그러더니, '이상한데, 일단 한 번 찍어 봅시다.'라며 엑스레이실로 날 보낸다. 촬영은 금방 끝났다. 또 이십 여 분을 기다리다 의사 얼굴을 봤다. 내 손목 사진을 화면에 띄우더니, 뼈와 인대엔 이상이 없단다. 주사 한 방 맞고, 일주일치 약 줄 터이니 그때도 아프면 다시 오란다.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 나오면서 옆지기에게 전화했다. 집 가기 전에 뭐 사갈 게 있느냐 물으며, 병원 다녀 온 이야기를 했다. 손목이 많이 아프다고도 했다. 내가 원했던 건, 내가 아픈 걸 알아달라는 거였던 듯하다. 또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며 마치 짐짝마냥 취급된 것에 대한 서러움을 얘기하고 싶었다. 옆지기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약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얘기 중, '나 아프다고!'라며 징징대는 톤으로 말하자, 왜 본인에게 짜증을 내냐며 짜증을 낸다.

 아차, 싶었다. 내가 지금 옆지기에게 뭘 요구하는 거지라는 자각이 들었다. 내 안에 흐르는 무의식적 전제를 검토한다. 정서적으로 돌봄을 받고 싶은 나의 요구는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뒤에 흐르는 어떤 하부인격이 작동했기에 상대의 반응이 저렇게 나올까하는 물음이 내 안에 올라왔다. 내 안의 그림자 왕, 내면의 가부장이 작동하고 있었던 거다. 여성 역할에 대한 고정적인 신념 말이다. '당신이 여자라면 나를 먼저 돌봐야지'라는 딱딱한 에너지 패턴이 옆지기에게 전달된 게 아닐까 싶었던 거다.

 

<내 안의 가부장>(백윤영미/이정규 옮김)에서 시드라 레비 스톤은, 내면화된 가부장제인 그림자 왕의 목소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돌봄 제공자 역할 또는 관계와 가족을 지키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여성은 타인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밀쳐두는 법을 배웠다. 그 결과 여성은 큰 대가를 치렀다. 자신을 위해 사고하고, 선택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마치 그림자 왕의 영역에서 '다른 사람이 우선'이라는 법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여성은 다른 사람을 돌보고 나서야 자신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44쪽)

 

 내 안에도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내 안의 가부장'은 이렇게 말했던 거다. '여성인 당신은 남성인 나의 고통을 먼저 돌보는 게 의무야. 나를 먼저 돌보고 그리고 나서 당신이 원하는 걸 하란 말이지. 당신이 원하는 건 지금 중요하지 않아. 나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정서적으로 돌보라고. 나 아프다고. 어서어서 정서적으로 알아줘. 그게 당신 의무라고!' 말로 표현되진 않았지만, 내 안에서 울린 그림자 왕의 목소리는 상대에게 에너지 파장으로 전달되었을 거다.

나의 짜증 섞인 반응과 내면의 목소리를 알아차리자, 옆지기에게 미안하다. 동시에 자기표현을 명료하게 해 준 옆지기에게 감사의 마음이 올라온다. 명료한 자기표현 덕분에 나 자신을 비춰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 그리고 이 책을 추천한 평화학자 정희진이 이 책을 '남성'들에게 권한 까닭이 이해된다. 정희진은 이렇게 썼다

"한국의 로컬 가부장제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싶은 남성에게 더욱 일독을 권한다. 특히 현재의 '젠더 전쟁'은, 늘 사유되기보다는 논란만 앞서왔던 한국사회의 여남 관계의 축도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혐오와 폭력으로 드러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얕은 무의식을 성숙한 의식으로 이끄는 도반(道伴)이 될 것이다."

신호승 (서클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