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입니다. 새 부서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시간에 인사부 전화가 왔습니다. 30년 근속상 수상자이니 창간행사에 참석하라는 얘기였습니다. 순간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수습기자로 시작해 이직 없이 한 회사에서 보낸 시간이 30년이라니... 참 속절없이 세월 빨리 지났습니다.
제가 입사한 1988년은 각 언론사 노동조합이 활성화되면서 ‘공정보도’, ‘편집권독립’ 구호를 입에 달고 살던 때입니다. 노동조합 중심으로 불같이 일어난 언론개혁 투쟁으로 구태 언론에 대한 반성, 새로운 언론에 대한 기대감이 취재 현장에 가득했었습니다. 그때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후배기자들 앞에서 정론직필에 대해 일갈하던 선배들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한데 어느새 그 선배들 머리엔 하얀 서리가 내렸거나 시원하게 민둥산이 됐습니다. 제 머리에도 하얀 서리가 반쯤 내렸고 정수리 부근은 시원합니다. 지금도 당시 선배들과 탁배기 한 잔 앞에 두고 저널리즘을 얘기하고 언론정의에 대해 토론합니다.
새삼 지난 돌아보며 별 얘기 아닌 잔소리인 줄 알지만 몇 줄 써 봅니다.
긴 시간 제가 언론노동 가치에 대해 고민한 것은 몇 가지 떳떳치 못한 경험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시위현장에서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도둑 취재하며 느낀 자괴감, 외부 권력의 간섭으로 자행된 불합리한 인사에 저항보다는 집단적 좌절에 빠졌던 무기력. 담배보다 해로운 신문 구독을 끊자고 주장하는 시민활동가 앞에서 느꼈던 부끄러움, 그리고 소위 힘 있는 취재원 앞에 스스로 겸손(?)해졌던 비굴함 등이 내내 불편했고 그 심리적 외상이 언론노동자로서 떳떳하게 안녕하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습니다. 30년을 그렇게 보냈고 앞으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겁니다.
2014년 봄, 대한민국 미디어·언론은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고 기자는 ‘기레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2016년 겨울을 뜨겁게 달구며 2017년 봄 대통령 탄핵과 문재인 정부 출범의 주축으로 우뚝 선 촛불민심은 ‘언론적폐 청산’을 강력하게 요구했습니다. ‘언론적폐 청산’은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결정됐습니다. 그리고 양대 공영방송 언론노동자는 파업투쟁을 통해 경영진을 교체했고 전반적 개혁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2년 지나 2019년!
적폐는 청산되고 개혁은 순조롭고 언론노동자는 안녕하신가요?
국경없는 기자회가 발표한 2019년 대한민국 언론자유지수는 이명박 집권 후 박근혜 정권까지 10여 년 동안 훼손되었던 언론자유가 노무현 정부 때 수준으로 회복되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자유지수는 정치 권력의 언론장악 의지, 편집권 규정 등 외부 요인과 형식적 제도 등이 주로 반영된 지수입니다. 언론자유지수의 호전과 상관없이 아직 언론의 신뢰도와 공정성, 정확성에 대한 수용자 조사결과는 최악입니다. 언론보도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겨우 25% 정도에 불과합니다. 바꿔 얘기하면 언론계 내부 시스템의 적폐 청산은 긍정적이지 않고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얘기입니다.
아직 세월호 보도 대참사는 복구되지 않았고 인적 적폐 청산도 미진해 ‘기레기’는 여전히 활개치고 수구적 의도로 심각한 편향성을 띤 페이크뉴스(fake news)를 양산하는 주범 중 하나로 구태 언론이 비판받고 있습니다.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극한 대립의 진영 논리를 의도적으로 재생산하여 갈등과 차별을 심화시키는 행태가 여전합니다. 더구나 최근에 기자사회의 저급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기자 단톡방 건과 같은 부끄러운 일이 할 말을 잃게 합니다. 적폐 청산은 고사하고 새로운 적폐를 쌓고 있는 안녕치 못한 언론 모습입니다.
미디어 기술과 환경이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미디어와 채널, 플랫폼이 무한 경쟁을 벌이고 다양한 콘텐츠가 저널리즘 기능을 수행하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환경에 정책과 법제도가 쫓아오지 못하고 정책 방향성마저 혼란스럽습니다. 미디어의 공공성보다 산업적·경제적·상업적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목소리도 어느 때보다 높습니다. 언론의 공공성을 지키기 어려운 환경입니다. 이런 현실이 언론사, 기자들의 책임이 아니라 강변할 수 있으나 언론노동자가 안녕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런 시대에 언론이 안녕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수구 독재정권이 언론장악에 나설 때 저항했지만 언론정의을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정권의 강력한 장악 의도와 음모적 추진, 이를 막을 수 있는 법제도의 한계 그리고 일부 언론인의 부역행위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론노동자 스스로 노동의 가치를 엄정하게 세우지 못해 여지를 준 이유도 있습니다.
언론은 민주적 공론의 장으로 역할을 하며 그를 통해 공공성을 구현합니다. 언론노동자는 언론이 공론의 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과정을 책임지는 주체입니다. 그 과정이 정의롭고 민주적으로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 언론노동의 가치입니다. 언론노동자는 그 역할을 엄정하게 수행함으로써 그 가치에 대한 사회적 공감과 연대의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언론노동의 가치와 역할에 대한 각오를 새롭게 하는 것이 언론정의를 지키고 언론노동자가 안녕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 환경은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저널리즘도 다양한 형태로 구현됩니다. 전통 미디어 시대의 사고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새로운 환경 적응해 언론정의를 훼손하는 적폐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경험했듯이 권력을 지향하는 언론은 반드시 부패하고 권력형 적폐가 됩니다.
적폐의 본질과 실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시민과 함께 혁신의 주체로 나서 언론노동자 그대가 기레기의 오명을 벗고 안녕하길 빕니다.
글 강성남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