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호] [영화이야기] ‘그린북’을 초월한 그들만의 우정언어 <그린북>
등록 2019.04.09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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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린북>의 오프닝은 백인 주인공 토니 발레롱가다. 그가 어떤 성격과 가정환경을 가지며, 어떤 색안경을 쓰고 흑인을 대하는지 말하는데 시간을 할애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차별을 이겨내고 싸워내는 흑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1960년대. 뉴욕 바에서 문지기를 하는 발레롱가는 거리의 언어를 사용한다. 말보다는 항상 주먹이 앞서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무엇이든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그는 약자에 대한 차별이 가장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다. 집을 수리하러 온 흑인 일꾼들이 입을 댄 유리잔을 쓰레기에 버린다. 그는 자신의 커뮤니티와 가족을 사랑한다. 단순하며 의리가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닥치자 그는 흑인 피아니스트 셜리박사의 남부 음악 투어에 운전자로 동행하기로 결정한다.

길게 뻗은 미 남부의 도로처럼 영화의 플롯은 직선적이다. 노예제는 일찌감치 폐지됐지만 여전히 흑인을 비하하는 태도는 광활한 대지를 감돈다. 예상할 수 있는 편견과 차별이 셜리 박사를 곤경에 빠뜨렸고 토니 발레롱가는 거리의 방식으로 이를 해결한다. 다른 피부색, 다른 성장 환경, 다른 취향과 언어 속에서 서로 어긋났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까워진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것 같지 않은 인물이 있지만 그들만의 파트너십으로 사회적 관습을 극복한다.

영화의 큰 플롯이 직선적이라면 캐릭터 관계는 역전적이다. 백인 우월주의 관습에서 탈피해 흑인 셜리박사가 백인 토니 발레롱가에게 교양과 학식을 가르치는 구조를 뼈대로 한다. 백인보다 지능적으로 우월한 흑인을 만들어 영화는 ‘무식하고 게을러서 흑인을 지하에서 일해야 한다’는 당시의 사고방식을 뒤집는다. 이는 잘못된 차별을 보여주는 것만큼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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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시대의 다수의 영화가 그렇듯 <그린북>은 정치적 올바름과 미국 사회에 아직도 현존하는 잘못된 사회 가치관을 꼬집는다.

하지만 영화가 단순히 설교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교양된 언어와 상류 사회의 예의를 가르치는 셜리 박사에게 발레롱가는 서민 음식 켄터치 치킨의 맛과 대중 음악의 즐거움을 알려준다. 켄터치 치킨은 천박하다면서 손도 대지 못하던 셜리박사가 치킨을 먹고 뼈를 창밖으로 던질 때 관객은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 그렇게 작은 일탈을 통해 셜리 박사는 그동안 쌓아온 성에서 밖으로 걸어 나온다. 교양있는 클래식 음악과 매너만이 아니라, 주변에 존재하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발레롱가는 역설한다.

발레롱가는 자신의 뿌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셜리는 ‘발레롱가’라는 이탈리아식 이름이 발음하기 어렵다고 상류사회에 통용되는 간편한 이름으로 바꾸길 권한다. 하지만 토니 발레롱가는 이를 거절한다. 백인 부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낯설어하지만 의연하게 이를 대처한다.

토니 발레롱가는 셜리 못지않게 중요한 영화의 중심이다. 남부를 여행하는 셜리 박사가 피사체로 공간에 존재한다면 토니는 이를 바라보는 시점이다. 그의 눈에는 일단 흑인을 위한 여행 안내서 <그린북>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차가운 현실이 들어온다. 천재 피아니스트 셜리박사의 연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지만 무대 밖 흑인 셜리에게 화장실도, 식탁도 공유하지 않는다. 결코 어려워 보이지 않은 작은 행동임에도 가랑비 젖든 사회에 스며든 차별적 악습을 깨드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백인에게 저항하는 셜리 박사의 모습이 들어온다. 시간이 지나자 반듯한 그의 외관으로 인해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셜리의 근원적 외로움도 발견한다. 박사는 자신의 음악을 교양있는 것으로 치부하며 백인 상류사회에 저항하지만 동시에 대중문화를 저급한 것으로 취급하고 백인 상류사회를 추종한다. 교양있는 자신의 음악 커리어를 위해 가족과의 단절도 당연하게 여긴다. 셜리박사는 자신의 사랑하는 음악에서도, 자신의 가진 뿌리에서도 모두 소외된 존재가 되어버린다.

흑인들이 거주하는 숙소에서 셜리 박사는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펍으로 향한다. 예상하듯 취한 백인들에게 혐오 발언을 듣고 몰매를 맞지만 그곳이 흑인 커뮤니티보다 그에게 편한 장소다. 자신의 속한 커뮤니티를 거부하고 계속해 혼자만의 성에 갇혀 사는 그의 모습은 이중적이다. 발레롱가는 ‘자신들의 가족과 뿌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거물이라 생각하며 상류사회를 위해 살아간다’고 그를 평한다. 다음 도시로 향하는 길에 셜리 박사는 농장에서 일하는 흑인들을 마주친다. 백인들의 흑인혐오를 바꾸려 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셜리 스스로가 자신의 뿌리를 증오했을지도 모른다. 충격과 애잔함 그리고 죄책감 등 수 십 개의 감정이 그의 눈에 서려 있다. 셜리 박사를 연기한 마허샬라 알리의 한 단어로 묘사할 수 없는 이 표정은, 이번 91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받게 한 요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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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여행의 목적은 서로 달랐다. 상류층 백인들에게 흑인에 대한 인식을 확대하기 위해 셜리는 떠났고, 가정의 경제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발라롱가는 떠났다. 이것이 뉴욕을 떠나 남부로 여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크리스마스 전에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 편지를 써달라는 와이프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발라롱가는 계속해 무언가를 끄적인다. 셜리박사는 자신만의 정적인 언어와 시적인 표현으로 이를 도와준다. 피부색도, 학식도, 언어도, 여행의 목적도 달랐지만, 그들은 하나의 목적으로 서로를 동기화한다.

크리스마스 이브. 마지막 공연 장소에서 셜리 박사는 식사를 거부당한다. 셜리박사는 더 이상 참지 않지 않고, 백인들을 위한 공연을 취소한다. 대신 흑인 커뮤니티에 위치한 펍으로 향한다. 그간 저급한 것으로 취급했던 재즈를 연주한다. 박사는 그렇게 성장한다. 흑인들이 입을 댄 유리잔을 버렸던 토니 역시도 성장한다. 뉴욕에 돌아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흑인 셜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셜리 역시 자신의 쌓은 성벽 박으로 걸어 나와 초대에 응한다. 영화 <그린북>에서 ‘그린북’의 정보는 애초부터 소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책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둘 간의 우정의 언어의 본질이다.

이재홍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