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제작 자율성 확대를 위한 ‘중재위원회’ 도입을 검토하자 (서명준)
등록 2016.10.06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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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방송 제작 자율성 확대를 위한 방송사 내부 중재위 도입의 필요성


제작 자율성 확대를 위한

‘중재위원회’ 도입을 검토하자


서명준(언론학 박사, 민언련 정책위원)


방송 콘텐츠의 상상력은 제작 자율성에서 

앞으로 100년 동안 먹고 살길을 찾던 산업 국가들은 우리에게도 이미 익숙해져 버린 창조경제라는 새로운 시장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인류가 ‘창조’해 오지 않은 ‘경제’가 없는데, 창조경제는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 ‘창조’를 부처 이름으로 가지고 있는 미래창조과학부를 보자. 창의적 아이디어와 과학기술이 접목하고 산업과 문화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것이 창조경제라는 나름대로 멋진 해석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최근 붐을 일으키고 있는 이른바 4차 산업 혁명의 내용과도 일맥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그런데 사실 창조경제와 4차 산업혁명의 공통점은 무엇보다 상상력에 있다. 역시 최근 붐을 일으킨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는 사회적 요청도 바로 이러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 속에서 나온 현상이다. 조금 사회과학적으로 말하면, 상상력이 곧 생산력이 되는 사회가 도래한 셈이다. 일상적으로 말하면, 상상력이 가치를 생산하는 사회, 다시 말해 돈이 되는 사회이다. 




4차 산업혁명까지 들먹이며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를 꺼낸 것은 상상력과 문화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사회과학이론을 펼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 문화콘텐츠를 주조해내는, 현대 신화를 창조해내는 연금술사인 방송프로그램 제작자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상상력을 펼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함이다. 방송 PD와 기자들의 창의성과 상상력은 보도·제작의 자율성 즉, 편성의 자유가 얼마나 보장되는지에 달려있다. 


‘노사간 자율협상’에 그친 편성규약의 한계

한국의 방송은 지난 80년대 말 이후 꾸준히 이어 온 언론민주화운동에 힘입어 지상파를 중심으로, 보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노사 간 자율협약을 통해 해결하는 방안을 마련했었다. 그러나 법적 구속력이 없어 문제로 지적되어 오다가 지난 2000년 방송법 4조4항에서 편성규약을 체결하도록 의무화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르면, 종합편성이나 보도전문편성 방송사는 프로그램 제작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취재 및 제작 종사자의 의견을 들어 방송편성규약을 제정하고 이를 공표해야 한다. 동법 106조 1항에서는 편성규약을 제정하지 않으면 1년 이하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방송 보도에서 발생하는 갈등 해결 방식에서 다소 문제점이 보인다. KBS, MBC, SBS 등 지상파 방송들은 노사를 대표하는 위원들로 구성된 편성위원회에서 갈등 사안을 협의하는데, 여기 합의에 이르지 않으면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다. 곧바로 막다른 골목인데, 더 이상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막힌 길은 돌아가지 않으면 부숴야 나갈 수 밖에 없다. 결국 돌아갈 길 없는 협상은 종종 파업으로 이어진다. 특히 방송사 경영진 퇴진 등과 같은 민감한 사안들은 협상이 결렬되면 곧바로 파업투쟁으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파업이 늘 승리한다면 모를까, 이런 힘겨루기에서 패배하게 되면 갈등은 사실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제작자들의 창의력을 억누르는 스트레스가 된다. 더구나 KBS, MBC와 달리 SBS 편성규약의 경우, 아예 사측 대표로는 사장을, 제작 실무 대표로는 노조위원장을 규정하고 있어 막다른 대립국면으로 치달을 여지가 더 크다.  



한국의 편성규약은 70년대 유럽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 방송에서 실현된 편성규약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당시 유럽형 민주화운동이었던 68혁명의 여파는 언론의 독립성과 자율성에 대한 사회적 요청으로 이어졌고, 이는 ‘언론의 내적 자유’라는 개념을 낳는다. 정치·경제적인 외부의 압박으로부터 편성·제작자들의 자유로운 취재·보도를 보장하는 것이 언론의 내적 자유이고 이것이 구체화된 형태가 편성규약이다. 특히 공영방송은 이를 의무화했다. 


중재위 통해 편성규약의 ‘한계’ 극복하는 독일·오스트리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갈등 해결 방식이 우리와 다른 점은 편성위원회 협의에서 경영진과의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외부 전문가들로 구성된 별도의 중재위원회를 소집한다는 점이다. 편성위원회가 노사 간 협의기구인 노동조합이 아닌 실무제작진의 대의기구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편성위가 작동하지 않을 경우 또 다른 중재기구가 개입하는 이중협상 구조를 갖도록 하고 있다. 대부분 법조인들로 구성되는 중재위원회에서도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해당 사안은 법원으로 이첩되어 민사소송이 제기된다. 이 중재위원회 제도는 한국에 도입되지 않았다.  


생산력으로서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미래 사회의 엔진이다. 방송이 사회적 상상력을 키우는 중요한 도구라면, 방송콘텐츠를 만드는 기자·PD의 자율성은 어떤 외압에도 절대 보장되어야 할 ‘절대 반지’이다. 현대판 신화를 만드는 창의적인 방송콘텐츠는 이들 편성·제작실무자의 자유로운 관념의 힘에서 나온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오늘 기자·PD는 이 힘을 마음껏 발휘하며 만끽하고 있는가. 언론노동자의 파업은 정당한 것이고 민주주의의 동력임은 자명하다. 더구나 현행 편성위원회가 노사동수로 되어 있지도 않고 또 법적 구속력도 없어 최소한의 형식적 공정성도 담보하고 있지 못한 현실에서 편성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선 파업이 거의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다만 편성위원회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파국을 피해갈 수는 있다. 편성위는 제작자들의 상상력을 해방시키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보면, 독일과 같은 중재위원회 도입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갈등은 편성위원회와 중재위원회에 맡기고 좀 더 자유롭게 제작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미디어 인텔리겐차들이 막강한 이데올로기의 힘을 신명나게 발휘하여 막강한 고급 콘텐츠를 창조해야 하지 않겠는가. ‘창조경제’보다 뒤처져서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