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_ 김현식의 테마 영화 기행]
어떤 이별: 화양연화, 도쿄타워, 스틸 라이프 그리고
김현식 이사
이번 호 주제는 ‘어떤 이별’이다. 대부분의 이별은 감당하기 어렵고 슬프다. 때론 미처 알지 못했던 ‘소중한 무엇’을 남기곤 한다. 사랑, 가족, 일상 등 삶에서 마주하는 이별을 다룬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화양연화 (홍콩·프랑스 / 감독 : 왕가위 / 출연 : 장만옥·양조위)
“내게 자리가 있다면 내게로 올 건가요?”(수리첸) “티켓이 한 장 더 있다면 나와 같이 가겠소?”(차우모윈) 1962년 홍콩, 수리첸(장만옥)과 차우모윈(양조위)은 같은 아파트 옆집에 나란히 이사 왔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자신의 배우자끼리 불륜에 빠졌다는 걸 알았다. 슬퍼하는 리첸과 상실에 잠긴 차우는 서서히 친밀해진다. 서로를 위로하며 다가서지만 둘의 감정은 닿았을 말 듯 엇갈린다. 비밀을 가득 품은 차우, 사랑을 잃고 헤매는 리첸. 홍콩을 떠나 싱가포르행을 결심한 차우는 리첸에게 요청한다. “부탁이 있소. 미리 이별 연습을 해봅시다.” 한참을 망설이던 리첸은 차우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한없이 울었다. 분명 연습이었건만 애끓는다. 아무리 울어도 빈자리는 결코 채울 수 없다는 걸 알았을까. 1966년 홍콩으로 돌아온 차우가 리첸을 찾지만, 그녀는 이미 떠나버렸다. 영화 마지막 장면 차우는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 벽 구멍에 가슴속 비밀을 털어놓는다. <화양연화> OST 중 가장 유명한 노래는 냇 킹 콜이 부른 “Quizas Quizas Quizas” 다. 실제 메인 테마곡은 우메바야시 시게루가 작곡한 “Yumeji’s theme”이다. 아파트 좁은 복도, 국수를 사러 국숫집 계단을 오르내릴 때 슬로우 장면 위로 흐르는 음악이다. 너무 외로워서 이끌렸던 수리첸과 차우모윈, 스쳐 간 인연의 헛헛한 심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아비정전>과 <2046>을 연결하는 <화양연화>는 아련한 기억을 더듬고, 쓸쓸히 옛사랑을 그리워한다.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일본 / 감독 : 마츠오카 조지 / 출연 : 오다기리 죠·키키 키린·우치다 야야코)
‘가족은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리 떨어져도 안 된다.’ 금세 이해할 수 있는 말이면서도 실제로는 이도 저도 어렵다. 오로지 아들(오다기리 죠)을 위해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건 엄마(키키 키린)가 있다. 아버지는 가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겉돈다. 미술공부를 하기 위해 도쿄로 유학 온 아들은 엄마의 응원과 지원 덕분에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한다. 그때까지도 엄마의 진심과 정성을 알지 못했던 아들, 엄마가 암에 걸려 투병한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를 도쿄로 모셔온다. 영화는 그 후 7년 동안의 이야기를 그렸다.
아들은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로 자리 잡았고, 모자의 집은 친구들로 넘친다. 엄마는 언제나 따뜻한 밥상을 대접하며 아들과 친구들에게 행복을 전했다. 도쿄타워가 보이는 병실에서 맞이한 삶의 마지막 순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엄마는 아들의 끼니를 걱정한다. “냉장고에 도미회랑 가지 된장국 있으니까 데워먹어라.” 병실 냉장고에 도미회, 가지 된장국은 없다. ‘네가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며 늘 좋아하던 엄마는 편지 한 통을 남겼다. “긴 세월 고마웠다. 도쿄생활은 아주 재미있었다. 엄마는 결혼에는 실패했지만, 마음 착한 아들을 선물 받아서 행복한 마지막을 맞을 수 있었다. 엄마는 행복한 마지막을 맞을 수 있어서 아무 여한이 없다.” 엄마가 꼭 한번 가고 싶었던 도쿄타워는 살아계신 동안 올라가지 못했다.
스틸 라이프 (영국·이탈리아 / 감독 : 우베르토 파솔리니 / 출연 : 에디 마산·조앤 프로갓·카렌 드루어리)
런던 케닝턴 구청 공무원 존 메이(에디 마산)의 업무는 독특하다. 홀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유품을 정리하고, 가족이나 지인을 찾아 장례를 치르는 일. 대부분 장례식은 찾아오는 이 없이 존 메이 혼자서 진행한다. 어느 날 존의 아파트 맞은편에 살던 빌리 스토크가 사망했다. 공교롭게 같은 날 정리해고를 통보받았다. 존은 22년 공무원 여정의 마지막 의뢰인 빌리 스토크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알코올중독자였던 빌리의 삶은 존에게 자극을 줬다. 빌리의 흔적을 쫓으며 여러 유형의 사람을 만났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정체됐던 존의 일상은 이전과 다르게 활기를 얻었다. 드디어 빌리의 장례식 날, 존은 마지막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까? 꼭 영화를 보길 권한다. <스틸 라이프> 후반부터 마지막 장면은 무척 쓸쓸하면서도 뭉클하다. 이 세상에 태어나 고귀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저마다 사정 때문에 외롭게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이별을 만들어준 존 메이의 삶은 거룩하다. 당연히 존의 마지막 여정은 절대 외롭지 않았다.
굿바이 아바나 (한국·쿠바 / 감독: 미정 / 출연: 안또니오·블랑카·넬다·에두아르도·로라·마리엘라)
마지막에 소개할 영화는 개봉 영화가 아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나만의 이별이야기다.
2005년 3월 12일 저녁 7시. 아바나 말레콘 방파제가 고요했다. 정확히는 밤바다가 차분했다. 낮에는 이 길을 싸구려 맥주를 마시며 걸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구아바나를 벗어나 10분 넘게 베다도 안쪽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온종일 되뇌던 질문이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 담쟁이처럼 뒤엉켰다. 아파트 앞 가로등 몇 개는 불빛이 선명했다. 에두아르도가 손을 흔들었다. ‘올라!’ 반갑게 함성을 지르고 3층으로 올라갔다. 6명이 흡족할 만한 용량의 론 한 병과 특별히 부탁받은 콜라 2ℓ 한 병을 손에 쥐고 있었다.
넬다와 로라, 마리넬라, 에두아르도는 며칠 후 아바나를 떠나는 나와 블랑카를 위로하기 위해 자신들의 공동자택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아바나를 떠나는 것 자체만으로 매우 슬펐다. 음악을 틀었고 살사를 췄다. 론에 콜라를 타서 마시니 부드럽고 감미롭다. 가난한 예술가는 바나나 튀김을 만찬으로 내놓았다. 타원으로 두툼하게 썰어 기름에 구운 다음 소금을 약간 뿌렸다. 뜨끈한 부침개를 먹을 때처럼 달고 퍼석퍼석한 알갱이가 씹혔다. 소금은 바나나 감칠맛을 돋웠다. 아쉬운 포옹으로 헤어지면서 ‛바나나 튀김이 정말 맛있었다.’라는 진심을 잊지 않고 전했다. 돌아오는 길 말레콘은 여전히 고요했다. 블랑카와 나는 서로 다른 풍경을 바라보며 같은 생각에 빠졌다. 우리의 이별식에서 울음을 쏟을 기세였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보다 더 슬펐을지 모른다. 오래된 슬픔은 인자한 눈빛에 숨어있기 마련이다. 넬다의 눈빛이 그랬다. 입술을 앙다문 나를 토닥이던 그녀의 손길이 구슬펐다. 11년이 흘렀다. 우리는 아직 이별하고 있다. 말레콘은 수십만 번의 폭풍과 고요를 마주하며 의연하겠지. 그날 밤 바나나 한 송이도 사 갔다면 양보하느라 망설이지 않고 물리도록 먹었을지 모른다. 그럼 달달한 기억이 여전히 남아있을까.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