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굿바이, 진정성!(서명준)
등록 2016.03.02 14:15
조회 506

 

뉴미디어 시대, 감성적 진정성이 아닌 객관적 현실성 논의할 때
굿바이, 진정성!

 

서명준(언론학 박사, 정책위원)

 

명색이 ‘미디어이론가’인 나도 언론사 기자들의 논쟁에서 이기기 어려운 주제가 있다. 바로 ‘현실’이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기자들은 대체로 ‘기자 자신의 눈앞에서 직접 발생한 일이거나 각종 자료와 데이터, 또는 인터뷰나 브리핑의 내용이 현실’라고 답한다. 현실적인 것은 사건 자체와 그에 대한 양적 수치, 그리고 여러 팩트들이다. 이런 응답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기자들은 뉴스의 현실 기전(mechanism)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시청률, 구독률, 그리고 클릭수와 같은 언론의 ‘시장요인’들이 저널리즘을 감성적으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고 이런 감성의 코드 가운데에서 강렬한 것은 바로 ‘진정성’이다. ‘채널 고정’, ‘신문판매 부수 증대’, ‘클릭수 증가’ 등과 같은 요인들에 가능한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현실’ 보도에 충실하려는 모습은 내가 이야기를 나눈 많은 기자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기자들의 화두는 현실을 담은 뉴스를 만드는 것이었다.


디지털 정보 홍수의 시대에 언론사 저널리즘의 감성 기전을 익히 알고 있는 유저들에겐 예컨대 팟캐스트 생방송이 진정성에서는 한참 앞서 있는 미디어다. 이것은 블로거와 유튜버들이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방송사나 거대한 조직과 같은 ‘빽’이 있지도 않은 사람이 별다른 방송시설도 없는 공간에서 별다른 연출도, 미리 짜여진 시나리오도 없이 우리와 ‘소통’한다. 1인 방송이 갖는 이런 진정성의 느낌은 아주 매력적이다. 자신의 진짜 문제를, 진짜 느낌을 세상에 드러내는 진짜 인간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별다른 정보를 주지 않아도 된다. 그가 실시간으로 현장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진정성을 갈망하는 유저들에게 이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니 언론사들은 블로거와 유저들의 콘텐츠를 인용하거나 심지어 포맷을 도입하려는 모습이다.

 

△ MBC <마이리틀텔레비전> 화면 갈무리

 

대표적인 사례가 MBC의 <마이리틀텔레비전>이다. 1인 방송 팟캐스트 형식을 도입한 이 방송에 대해 미디어문화이론가 발터 벤야민(W. Benjamin)이 말한 “채널 분산”이 인용되고, SNS의 상호작용성과 양방향,  일상성 등 찬사의 해석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진정성에 대한 유저의 갈망에서 나온 한 현상이고 무엇보다 진정성 경쟁에 뛰어든 언론의 한 현상일 따름이라고 본다. 어쩌면 일부 언론사들이 실수라고면서 일베 등 특정 사이트에서 만들어진 콘텐츠를 이용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일지 모른다. 
 
진정성은 감성이 아닌,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이해에서 나와
기자들과의 ‘미디어 현실 논쟁’에서 늘 지는 것만은 아니다.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한 언론사들의 경쟁이 리얼리티 프로그램과 팟캐스트의 인플레이션 현상을 초래하고 있지만, 그 창조자들인 블로거나 유튜버들에게도 진정성은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을 밝히면 되기 때문이다. 양방향성의 미디어 환경에서 탁월한 현장성과 현실적 시공간에 매료되지만 사실 그들은 자신만의 시각에서 자신의 의견만을 반영하는, 진정한 소통보다는 오히려 ‘일방적인’ 소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진정성은 가공되지 않은, 분석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논평, 해설, 시사다큐와 같은 사안에 대한 충분한 분석과 복잡한 맥락에 대한 심도 깊은 추적이야말로 진짜 현실에 다가가는 본질적인 방법일 수 있다. 사건 개요에서부터 상세한 흐름까지 모두 사전에 기획되고 철저히 검증되어서 의혹을 밝히는 탐사보도야말로 가장 리얼한, ‘진정성 있는’ 프로그램일지 모른다.

 

디지털 뉴미디어만 있으면 진정성의 왕국 건설된다는 환상은 버려야
디지털 기술은 진정성의 희망을 주었다. 그것은 또 객관적 현실에 한발 짝 더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와 세력을 구축할 수 있는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마음먹기에 따라, 감성에 따라, 또한 권력의지에 따라 현실의 일면을 확대·해석할 수도 있다.


뉴스 알고리즘과 뉴스피드로 이미 엄청난 양의 뉴스가 생산되고 있지만, 그것은 지향하는 이념에 따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유저 집단을 양산하기도 한다. 이 양방향 스마트 시대에도 오히려 진보-보수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진보는 보수 신문, 보수 방송, 보수 팟캐스트를 이용하지 않고 보수는 진보 신문, 진보방송, 진보 팟캐스트를 이용하지 않는다. 양 진영간의 진정성 있는 소통은 형식으로만 존재할 뿐, 현실의 내용이 아니다. 심지어 언론사는 물론이고, 블로거, 유튜버들조차 그들만의 수용자를 선취하기 위해 스스로 담을 쌓는 경우가 적지 않다. 태생적으로 양방향성의 열린 뉴미디어는 이렇게 특정 집단의 닫힌 매체로, 진정성과는 진정 무관한 매체로 전락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렇다면 문제의 책임 소재는 언론사와 같은 콘텐츠 생산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용자에게, 유저에게도 똑같이 있다.


유저들의 직접커뮤니케이션, 수평적 관계, 나아가 직접민주주의의 가능성 등 디지털 뉴미디어만 있으면 진정성의 왕국이 건설될 것이라는 예상은 그래서 소박한 꿈일지 모른다. 더구나 디지털 기술에 취해 객관적 현실 분석이 아닌 감성의, 진정성의 망상에 종속될수록 언론은 점점 더 자신의 토대를 잃게 될 것이다. 현상만을 쫓을수록 본질에서 멀어지는 변증법적 현실을 알지 못하는 저널리즘은 자신의 토대인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진정성은 감성이 아닌, 객관적 현실에 대한 이해에서 나온다. 감성적 진정성 말고 객관적 현실성에 대해 논의할 때가 되었다. 진보언론이든 보수언론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