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이야기]
<사도> 조선미래의 불길한 징후
이선이 경희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이글은 아마도 역사학자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잠시 제쳐둔다면, 역사학자가 역사학자답지 않은 방식으로 써내려간 영화 관전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영화 <사도>의 시작은 사도 이선으로 분한 유아인의 분노와 광기로 막을 연다. 유아인은 덧입은 상복을 휘날리며 칼을 거머쥔 주먹과 눈빛에서 아버지(영조)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온몸으로 열연한다. 이 장면에서 사도 이선은 분노와 광기의 화신이다.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광기란 자연이나 인간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광인이란 우리의 교육, 우리의 사회관습, 우리의 예의범절에 스며든 그토록 진절머리 나는 획일성을 깨뜨린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광인이 한 사람 나타난다고 생각해보라. 그는 술렁임을 불러일으키고 각자에게 개성의 일부분을 회복시키는 한 알의 누룩인 셈이다. 그는 뒤흔들고 동요시키며 동의하거나 비난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진실을 새어나오게 하고 유덕한 사람을 알아보게 하며 악당의 가면을 벗긴다”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이선의 광기와 광인 이선은 영조와 사도, 아버지와 아들의 뒤틀린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조선후기 사회와 그 이후 조선 사회를 읽는 중요한 키워드일지도 모른다.
사도는 1735년에 태어나 1762년에 사망했다. 영조는 1694년에 태어나 1724년 왕위에 올라 1776년까지 무려 52년 동안 재위했는데, 특히 주목해야 하는 지점이 사도가 살았던 시기이다. 이 시기 서양의 역사를 살펴보면 계몽주의로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이 정부를 개혁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구습에 반항하는 흐름을 만들어 훗날 프랑스혁명과 미국혁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계몽사상가들은 구습(=아버지)을 살해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서양의 ‘아들’들이다.
아버지 영조로 분한 송광호는 아들 이선에게 “너는 존재 자체가 역모이다”고 일갈한다. 영화 속에서 영조가 아들 이선을 힐난하기 위해 날린 이 대사는 지상명제이며 진실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아들은 ‘역모’로 존재해야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
영조는 유학군주로 학문을 사랑하여 친히 서적을 찬술하였다. 영화에서도 아들 이선을 위해 밤을 세워가며 친히 교육책을 쓰고, 그 내용을 완벽하게 암기하지 못한 세자를 질책하며 노여워하는 장면이 나온다. 격분하는 왕을 향해 신하는 유교경전에는 흥미가 덜하지만 무예나 잡학에는 능하다고 세자의 역성을 든다. 사도세자는 무인적 기질이 뛰어났으며 무예에 대한 열정이 저술로도 이어졌다. 이선은 1759년(영조 35년)에 장수와 신하들이 무예에 익숙하지 않은 것을 걱정해 『무기신식(武技新式)』이라는 책도 지었다. 무예를 닦고 잡학에 능하며 선물 받은 개의 그림을 그리는 예술적 감성이 탁월한 이선에게 영조는 “학문을 게을리 한다”고 힐난한다. 영조에게 ‘학문’은 ‘유교경전’일 뿐이다. 이는 아버지의 ‘법’으로 아들을 재단하는 폭력의 행사다. 여기에 이선은 “숨이 막혀 견딜 수 없다”는 비명을 지른다. 당시 조선은 중국의 유교가 교조화 되는 형상을 띄고 있었다. 교조화 된 고루한 유교경전만이 절대적 가치로 조선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의 비명은 조선사회의 비명으로도 읽힌다.
그런데 앞서 말한 “아들은 ‘역모’로 존재해야 한다”에서, 그 ‘역모’는 과거를 넘어서는 ‘창조’여야 하며, 기나긴 힘겨루기 끝에 맺는 열매다. 그러나 조선사회 아버지의 ‘법’은 사도를 광기로 내몰았다. 아들의 ‘다름’은 ‘창조’로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보상적 폭력’에 머물며 주변을 파괴한 채로 사그라졌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그 무엇을 창조하지 못한 결말은 비극으로 끝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도가 아버지 영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서 조선 식민화의 징후로 읽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까? 사도는 아버지 영조를 넘어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갔어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 시대의 절대적 가치와 ‘다름’의 세계를 만들고자 한 아들은 아버지의 뒤주에 갇혀 죽는 참혹한 결말을 맞았다. ‘다름’의 세계가 ‘교조’의 세계에 말 그대로 압살 당한 것이다.
나는 세자의 개인적 자질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당시 조선의 사회에 없었던 것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아버지(제왕)의 법, 교조화 된 학문과 사상의 세계에 다른 것이 스며들어 숨을 쉴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없었던 그 사회를 영조와 세도는 은유보다 더 강렬한 역사 사실로 보여준다.
뒤주는 또 다른 은유이다. 영조는 아들에게 자결을 명령한다. ‘다른 것’에게 사형을 언도한 그 힘, 그 힘이 관통되지 않자 뒤주를 들여 자신과 다른 존재를 그 속으로 욱여넣는다. ‘숨 막혀 견딜 수 없어’ 광기로 치달은 아들을 실제로 질식시킨다. 교조의 세계와 다름을 추구한 기운, 다른 세계를 향한 갈망의 기운을, 뒤주의 틈새를 ‘떼로 덮어라’는 명령으로 봉쇄하여 고사시킨다. 이것은 다름과 저항의 기운이 조선 사회 곳곳으로 퍼져가는 것이 막힌 현실에 대한 은유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현실은 이후 자생적이고 주체적으로 다른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는 세력을 만들지 못한다. 아버지의 구태의연은 한 번도 무너지지 않고 온전하였으며, 그 온전의 결과는 조선의 미래였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금천교에 엎드린 아들 위로 영조가 올라 탄 가마가 개선가를 울리면서 지나가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아버지에 의해서 압살당한 아들의 세계, 즉 조선의 미래를 불길하게 내비친다.
그래서 우리는 정조에게 과도한 기대를 투영한다. ‘정조가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냈으면…’ 하는 당위의 기대는 그에 대한 과대평가로 이어진다. 그러나 정조도 영조의 시퍼런 서슬 아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존재했다. 살기 위해 할아버지(낡은 시대의 관습과 사상)에게 순응한 정조는 애당초 다음 밝은 시대를 열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녔다. 할아버지가 기뻐하시니 학문을 하는 ‘나도 내가 싫은’ 어린 정조는 주체적이고 자생적인 다음 시대를 여는 군주가 될 수 없는 존재이지 않을까.
중국의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아버지 당고조를 유폐하여 동서양의 문명이 교류하는 새로운 제국 당의 시대를 열었다. 조선의 역사에도 있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를 뒷방으로 몰아내고 새로운 조선을 열었다. 아들들은 그렇게 아버지를 ‘죽이고’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뒤주’와 같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 속에서 ‘사도’라는 무거운 주제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관객 600만을 넘기며 말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모두가 ‘아버지’를 죽이는 ‘아들’이 되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무의식적 웅변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