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_이기범]
"쉼표와 칭찬, 우리를 계속 활동하게 하는 힘"
글_유민지 활동가
사진_이병국 회원
민언련 30주년 행사 때 열 명 남짓한 회원에게 ‘회원상’을 시상했다. 민언련 30년 역사에서, 자신의 열정을 온전히 쏟아 부어준 고마운 회원들에게 주는 상이었다. 그 열 명 남짓한 회원 중 한 명이 이기범 회원이었다. 그러나 기념식 당일, 그는 사진을 찍느라 정작 자신이 상패를 받지 못했다.
일 년이 지난 2015년 끝자락에, 그는 민언련 사무실에 언론노조 교육선전실장으로 회의를 하러 왔다가 자신의 상패를 받았다. 상금도 없는 소박한 상패 하나를 받아들고 감격의 탄식을 내뱉더니 “내가 이런 상을 받다니”라며 연신 싱글벙글하고 기념사진도 찍는다. 이런 이기범 회원을 보자니, 민언련의 힘은 역시 ‘회원’이라는 명제가 다시 내 머리를 친다.
‘사슴 같은 눈망울’
‘사슴 같은 눈망울’. 이 말을 쓰면서 얼마나 썼다 지웠다는 반복했는지 모른다. 너무 고루한 표현 같기도 하고, 나보다 나이도 많을 뿐 아니라 불혹을 넘긴 이에게 이런 표현을 쓴다는 게 맞는지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나 어쩌랴…. 그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사슴 같은 눈망울’인 것을!
이기범 회원은 전국언론노조(이하 언론노조) 상근자 중 가장 오래, 11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힘에 부쳐서, 희망이 안보여서, 혹은 또 다른 이유로 사람들이 뜨고 들어온 그 자리에 아직도 그가 있다.
“2004년 3월에 언론노조에 들어와서 교육선전실(이하 교선실)에 계속 있었어요. 어쩌다 보니, 제가 제일 오래 있게 됐네요. 예전에는 노동조합에서 힘으로 돌파해나갔던 것이 이제는 법률 쟁점 소송으로 가고, 조직들은 다 깨져나가고, 새롭게 조직화는 안 되고…. 그러면서 지치는 거죠. 그런데 교선실은 총무실, 조직실과는 다르게 ‘자뻑’이 가능해요. 평가는 엄혹할 수 있으나, 자기가 만든 선전물 보면서 스스로 ‘이번에는 작년보다 좋게 만들어졌다’하는 ‘자뻑’이요.”
혼자 있기 때문에 글도 써야 하고, 사진도 찍어야 하고, 신문 편집도 해야 하고, 또 언제부터인가는 동영상 촬영과 편집을 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는 그 상황을 ‘긍정’으로 해석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힘들 수 있지만, 좋은 점이 있어요. 뭔가 새로운 걸 계속 배우고, 또 그걸 해내는 나를 보게 되니까요.”
맞다. 그런 사람이었지…. 문득 떠오른 기억. 2014년 언론노조와 함께 공정선거감시단을 할 때, 유인물 편집 때문에 ‘인디자인’이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해야 했다. 한 번도 써보지 않은 프로그램이라며 황당해하던 그는 그날 저녁 노트북을 들고 사무실을 찾아왔다. 밤늦도록 속성으로 배우더니 다음날부터 서툴게나마 실전에 사용했고, 자신이 만든 유인물을 보며 껄껄 웃었다. 그는 편안하면서도 ‘무서운’ 사람이다.
전문지에서 경험한 ‘죽은 노동’
“99년에 민언련에 가입했어요. 대학교 1, 2학년 때 교지 활동을 하다가 군대를 다녀오니, 이젠 할 일이 없는 거예요. 그때 민언련을 만나 신문분과에 들어가게 됐어요. 맨 처음에 서울신문 모니터 담당이 됐을 거예요. 조중동 모니터는 일정 레벨이 돼야 담당할 수 있었거든요.(웃음)”
졸업을 하고, 전문지 기자로 입사한 이후에도 신문분과 활동을 이어나갔다.
“전문지에서 1년 정도 있었어요. 나오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광고영업. 그걸 하고 싶지 않았어요. 지치고 힘들었고, 못하겠더라고요. 신문에는 유료 광고 몇 개 이상이 차야 되잖아요. 그런데 안차잖아요? 그럼 사장이 부장 데스크들을 불러요. 거기서 엄청 쪼는 거예요. 광고 몇 개 안찼으니까 신문 못 나간다고. 그럼 부장들은 광고 줄 곳을 알아보느라 전화하고 난리예요. 그 분위기가 너무 싫었어요.”
웃음기 가신 얼굴에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심지어 광고가 몇 개가 안 찼다고 신문 발행을 하루 미뤄요. 독자와의 약속이 날짜인데, 그게 기획이나 기사 때문에 밀리는 게 아니라 광고 때문에 밀리는 거예요. 납득할 수가 없더라고요. 다음날 누가 어디서 광고를 끌어오던, 대포(미리 당겨서 쓰는 광고)를 하던지 해서 그걸 해결해야 발행이 되는 거예요.”
그는 많은 언론사들이 발행 연기 압박과 더불어 ‘돈맛’으로 기자들을 길들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광고를 따오면 10%인가를 광고를 따온 기자에게 인센티브를 줘요. 광고 리베이트죠. 광고비가 자기 기본임금을 넘는 사람들도 많아요. 그리고 월급을 현금으로 줘요. 통장으로 쏴주지 않고. ‘돈맛’이에요. 내가 열심히 안 뛰어서 광고 조금 받아왔으면 요만큼인거고, 이번에 열심히 뛰면 돈이 이만큼 내 손에 쥐어주는 거라는 걸 알려주는 거죠.”
그런 선배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자신 또한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도 더 이상 견디기 힘들었다고 한다.
“내가 왜 이러면서 민언련 활동을 하고 있는 거지? 신문 모니터 백날 해봤자 뭐하나, 내 삶은 개판인데…. 이게 죽은 노동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신문분과 한 선배가 <노동일보> 기자를 뽑는다면서 추천하더라고요. 월급은 낮다, 그래도 원하는 기사를 쓸 수 있다는 말과 함께요.”
언론 노동자로 산다는 것
2001년 <노동일보>에 입사해 신문 편집을 맡았다.
“그때 편집이라는 걸 처음 배웠어요. 막내로 하다가, 회사가 문을 닫을 때는 편집부 내에서는 내가 제일 고참이 돼있었죠. 경영이 어려워져서 2003년 경 폐간됐어요.”
또 끝까지 남았다는 얘기에, 원래 깃발 꽂으면, 끝까지 가는 게 신조냐고 물었다.
“내가 집안에 애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근데 내가 빠지면 더 어려워지는 건 뻔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저라도 가는 거죠. 그때 함께 일했던 <노동일보> 멤버들과는 요새도 산에 함께 가기도 하고 그래요.”
그런 시간들이 인연이 돼 언론노조 상근자로 들어온 후, 11년이 흘렀다.
“얼마 전에 선배랑 산에 올라갔는데, 그 선배가 언론사 다시 갈 생각 없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지금의 언론 노동자들이 노동하는 건 살아있는 노동이 아니에요. 그걸 너무 많이 봐요. 거기서 내가 버틸 자신이 없어요.”
살아있는 노동? 그 의미를 물었다.
“초년병 때 이 사회의 공기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들어가잖아요. 내가 생산한 기사가 사회를 바꿀 수 있으리라, 내가 쓴 기사를 마음대로 바꾸면 데스크에 멋지게 종이 한번 집어 던질 수 있으리라 그런 꿈을 꾸었을 거예요. 근데 지금 현실은 그런 게 전혀 되질 않아요. 좌절당하고 잘리고…. 내가 생산한 글이 계속해서 배반당하고, 자기를 속이고 있는 글이 나오는 것, 쓰레기처럼 발산하는 글들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런 노동이 과연 행복할까요?”
언론자유지수가 떨어지는 건 누구나 알지만, 기자들의 만족도를 주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자들 대상으로 조사하면 만족도는 계속 떨어지고, 이직 생각에 대한 비율을 점점 높아지고 있어요. 이건 뭔가 분명히 잘못된 거예요.”
눈으로 보고 있는 언론 노동자들의 갑갑함을 토해낸다.
“MBC 경영진이 언론노조 MBC본부 민주언론실천위원회 보고서를 막 찢은 일이 있었어요. 미디어오늘이나 미디어스에서 MBC 사측의 문제를 지적하는 기사를 써도 습관적으로 소송을 걸어버리죠. 이런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이 당연히 위축되죠. 노조도 파업도 하고 뭐든 칼을 다 써본 건데 안 풀린 거잖아요. 그런데 사회적 지탄과 비판은 다시 언론노동자들을 향해 쏟아지니, 그들도 환장하는 거죠. 이런 상황을 함께 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어요.”
“쉼표와 칭찬, 우린 너무 인색하지 않았나요?”
쉼표가 필요했던 이기범 회원이 처음 찾은 곳은 비정규센터에서 하는 글쓰기 강좌였다.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 글쓰기 소모임을 만들어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자기가 쓴 글을 나누며 합평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참여연대에서 하는 춤 수업을 들었어요. 그땐 정말 도피처가 필요했거든요. 춤 수업을 배울 때 세월호 참사가 났어요. 함께 듣는 사람들의 춤에서 슬픔이 묻어나고, 저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힘든 시간들이 서로 춤으로 묶이면서 치유하는 그런 경험을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번씩, 자기에게 ‘쉼표’를 찍어주기로 했다.
“어느 날 보니까, 집에 와서도, 쉬면서도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미리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심각할 때는 꿈에도 나오고…. 이게 웬 미친 짓이에요. 근데 그림을 그리다 보면, 정말 두세 시간을 몰입할 수 있어요. 고민은 정말 단순한 것만 남는거죠. ‘여기에 노란색 칠할까, 빨간색 칠할까’하는 고민이요. 그렇게 다시 재충전하고, 반성하고 또 살아갈 힘을 얻는 거죠. 그런 쉼표가 있어야 해요. 강제로라도.”
또 하나가 더 필요하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이다.
“운동을 하면서 잘했다는 칭찬을 받은 기억이 별로 없어요. 특히 시민사회, 운동공간은 칭찬에 인색한 것 같아요. 잘하면 기본적으로 잘 하는 건 줄 알아요. 그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떤 노력을 했는지는 잘 살피지 못하고, 그러니 잘 챙겨주지도 않아요. 그런데 예술은, 미술은 그렇지 않아요. 기본적으로 리액션을 참 잘해주세요.”
그냥 생각 없이 그은 선 하나에도 “와우~”하며 북돋아준다며, 그런 선생님들의 태도에서 자신과 우리의 현장을 돌아보게 된다고 했다.
“같이 살아가면서 칭찬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생각해보니까 우리가 칭찬에 인색하기보다는 너무 바빴던 거 같아요. 챙길 시간도 없이요. 그런데 사람이 잘하려면 계속 칭찬해주고 북돋아줘야 해요. 그래야 계속 갈 수 있죠. 운동하는 곳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줄 수 있어요?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더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해요. 사회적으로 운동은 계속 깨져나가는 시기잖아요. 화나고, 답답한데, 서로 위로와 ‘감싸 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또 다시 선거보도감시를 시작하며
“선거 모니터에 맨 처음 결합한 건 2000년이에요. 낙선낙천운동이 벌어졌을 때. 그때 정말 재밌었어요. 뭔가 우리가 하면 바뀔 수 있는 분위기였거든요. 언론개혁 분위기와 맞물려서…. 모니터가 나오면 기자회견도 하고, 기사도 많이 나오고, 뭔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 아마 제가 기자회견에서 성명서도 낭독했을 거예요.”
신문모니터위원회 일원으로 치열하게 모니터를 하고, 기자회견에서 성명서를 읽었던 것은 그에게는 자랑스러운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2012년에 언론노조에서는 대선 보고서가 나오면 영상으로 만드는 작업을 했어요. 지상파에서 안철수, 문재인과 관련된 보도가 심각한 수준이었거든요. 소리가 갑자기 묵음처리 되기도 하고, 박수소리가 지워지기도 하고…. 이건 보고서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영상을 편집해서 클립을 만들었어요. 그들은 더 전문적이고, 악의적이고 치밀한 방법으로 왜곡보도를 하고 있는 거예요. 훨씬 좋아진 기술로 장난을 치는 거죠.”
그러나 이번 선거 모니터를 말하면서는 긴 한숨이 먼저 나온다. 그는 2016 총선감시연대에서 민언련과 함께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언론노조 교선실장이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책무는 크다.
“이번 선거보도감시는 솔직히 흥이 안 날 것 같아요. 언론판도 그렇고, 정치판도 어그러져서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정치는 굉장히 소중한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국회의 의정활동이 돌아가질 않아요. 청와대나 권력자 한두 명에 의해서 정치가 끌려가요. 그러니 국민들 관심이 떨어지죠. 내가 이 행동을 하면, 저 정치인이 받아서 정책이 바뀐다 하는 게 있어야 하는데…. 정치 자체를 없애버리고 있어요. 이럴 때 언론은 정치가 제대로 설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 데 그걸 안 하죠. 대단히 잘못하고 있는 거예요.”
인터뷰 끝자락에는 2016년 선거보도감시연대 활동을 어떻게 좀 더 꼼꼼히 하고, 어떤 방식으로 가공해서 더 많이 확산시킬 것인가 하는 토론이 이어졌다. ‘흥이 안 날 것’ 같지만, 그래도 우리까지 눈 감아 버리면, 그들의 장난질은 더욱 거세질 것이기 때문이다.
민언련 막내 활동가이던 시절, 나는 선배 활동가들에게 후배를 안 챙긴다고 툴툴거렸다. 어떤 때는 민언련에 내가 필요하긴 한 건가, 나는 왜 더 잘하지 못할까 하며 좌절하기도 했다(물론 지금도 가끔 그렇다). 그런데 어느새 6년 차, 선배 활동가가 된 나는 칭찬에 인색하고, 내 몸 하나 챙기기에도 버거운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이기범 회원이 말한 ‘쉼표’와 ‘칭찬’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