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인터뷰] "혼자라면, 이렇게 언론운동 못 했을 겁니다."(2015 9월호)
등록 2015.09.1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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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원로 언론인 임재경

"혼자라면, 이렇게 언론운동 못 했을 겁니다."
- 언론개혁운동의 산증인, 민언련과 한겨레의 산파 임재경 -

 

 

 

독재 권력에 맞서 언론자유운동을 했던 70~80년대 해직 언론인들이 만든 민언련(1984년 창립 당시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약칭 ‘언협’)에는 유난히 존경받는 어른이 많다. 작고하신 고 송건호, 김태홍, 성유보 선생은 물론이고, 총회나 행사마다 늘 민언련을 찾아주시는 원로 언론인들은 민언련의 큰 버팀목이며 자산이다. 그리고 그중 한겨레 초대 부사장을 역임한 임재경 선생은 민언련 회원들이 매우 존경하고 따르는 ‘진짜 선생님’이다.
그래서 <날자꾸나 민언련> 편집회의에서 인터뷰의 대상자로 그를 떠올렸을 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 했다. 그를 잘 담기엔 ‘회원인터뷰’가 너무 조촐하게 느껴졌고, 누가 그분을 그릴지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팔순을 맞은 그의 삶을 조명하고 싶은 기대와 이런 어른이 우리 민언련 회원임을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욕심에 우리는 용기를 냈다. 전화로 운을 뗐는데 그는 너무나 흔쾌히 응하며 “인터뷰는 김 처장이 진행하지?”라고 물으셨다. 입으로는 “그럼요!”라고 답했지만, 머릿속은 부담으로 먹먹해왔다.
며칠 후 그를 찾아뵙고 인터뷰에 대해 설명해 드렸다. 그러나 나의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그의 눈빛에는 ‘인터뷰이 임재경’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보다, ‘인터뷰어 김언경’이 뭘 준비해서 무엇을 묻고 쓸지 지켜보자는 어르신의 관심이 가득 느껴졌다.
다음날부터 나는 출퇴근 시간에 <한겨레신문>에 연재했던 ‘임재경의 길을 찾아서’와 <내일신문>에 실렸던 ‘임재경칼럼’, <녹색평론>에 연재 중인 ‘임재경회고록’ 등을 찾아 읽었다. 그 바람에 나는 한동안 그에 푹 빠져 지냈고, 그 시간이 참 좋았다. 내가 시도 때도 없이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바람에 “또 준우할아버지 얘기!”라는 딸의 핀잔도 들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의 큰며느리와 동네 친구다. 우리 아이들은 그를 ‘준우할아버지’라 호칭한다.) 임재경. 인간미가 넘쳐 따뜻했지만, 나의 부족함을 새삼 절감하게 해주어 서늘하기도 했던 그와의 시간을 정리해본다.   - 김언경 사무처장


 

 임재경(任在慶)의 삶(1936~)

 

- 북한 땅인 강원도 김화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남
- 일제 강점기 시절에 초등학교를 다니다, 10살에 해방을 맞음
- 한국전쟁 이전에 가족이 서울시로 월남
- 전쟁 발발 후 피란하여 군산고등학교 졸업
- 불문학을 꿈꾸는 문학청년이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55년 서울대학교 영문과에 입학
- 61년에 조선일보에 입사해 73년까지 기자생활
- 71년 프랑스 파리 제1대학에서 1년간 프랑스 혁명사 청강
- 73년 김경환 조선일보 전 편집국장의 권유로 대한일보로
  이직했으나 두 달 만에 폐간
- 74년부터 한국일보로 이직. 80년까지 경제 전문 논설위원
- 74년 11월 함석헌 등이 주동한 ‘민주회복 국민선언’에 참여
- 80년 5월 신군부를 규탄하는 ‘지식인 134명 시국선언’에 참여
- 80년 ‘김대중 과도내각’에 연루돼 한국일보에서 해임·투옥
- 석방 후 극심한 감시 속에서 바둑 등으로 소일하다
   83년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국제정치 연구
- 84년 귀국 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결성에 참여
   이후 언협과 민언련에서 공동대표, 지도위원, 이사 등 역임
- 87년  <국민회의> 공동대표로 6월 민주항쟁에 참여
- 87년 7월 새신문 창간을 위한 논의 시작
- 88년 한겨레신문 창간. 한겨레신문 편집인 겸 논설주간,
   초대 부사장, 논설고문 등을 역임
- 92년 1년간 독일 베를린자유대 독일 현대사와 통일과정을 청강
- 94년~03년, <창작과비평사> 편집자문위원 비상근이사 역임
- 2002년 ‘청암언론문화재단’ 이사 역임
- 2003년~05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 2012년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가 제정한 ‘단재상’
  언론상 부문 첫 수상자로 선정. “임재경은 민주주의의 신장,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활동에 적극 헌신해 오는 등 단재
  선생의 정신을 일관되게 실천해 오셨다”는 심사평을 받음
- 1983년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한 「상황과 비판정신」 등
   다수의 저서와 논문을 저술

 

그는 언론인이다. 조선일보에서 경제 기자 생활을 오래 했다. 프랑스 문학과 샹송을 사랑한 문학청년이었던 그는 기자가 된 후, 자신이 얼마나 세상을 모르는 애송이인지 깨달았다고 한다. 기사의 ABC도 모른 채 입사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특히 경제 영역은 전문성이 많이 요구되는 분야인 만큼, 그는 제대로 된 경제기사를 쓰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했다.


“언론운동 한 사람 중에서는 나처럼 경제부에 오래 있던 사람이 없었어요. 근데 그건 내가 경제를 많이 알아서가 아니에요. 제가 처음 기자를 할 때는 부끄러운 경험도 있었죠. 그래서 오기로 더 집요하게 공부를 했던 것 같아요. 술을 아무리 많이 먹고 들어가도, 꼭 다시 세수하고 경제 관련 책을 읽고 잘 정도였어요.
기사도 열심히 썼죠. 지금도 기억나는 건, 내가 조선일보 경제부에 있던 1968년 쯤, 한국 제조업의 임금실태를 처음으로 분석 보도했어요. 기자들과 서울서부터 대전, 대구, 울산, 부산까지 발로 뛰며 당시 최초로 기업체명과 초봉, 기본급, 노동조합 유무 등을 정리한 것이었어요. 당시엔 화제가 된 기사였죠.”
경제 기자는 유난히 돈의 유혹에 약한 부서로 알려져 있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경제부에 있으면 취재대상과 친숙해져 모진 기사를 쓰지 않는 나쁜 습관이 생겨요. 길들여진다는 말이죠. 비판 기사를 써도 적당한 수준에서 선을 긋죠. 근데 나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막 달려들어서 써대어요. 그래서 경제 관료들한테 굉장히 독한 놈이란 소릴 많이 들었어요. 심지어 상종을 못 할 놈이라고. 술은 사주는 대로 다 마시고, 내키는 대로 기사를 쓰니 정체를 알 수 없다고 욕을 먹었어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선생님! 맛있게 술 받아먹고 기사를 나쁘게 써주면 정말 나쁜 사람 아닌가요?”라고 물었다.


“아…내가 솔직히 거기서 하나도 안 받아먹었다고 할 수 없어요. 처음엔 기자가 취재원에게 술을 얻어먹고 용돈을 쓰고 이게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집디다. 그런데 기자 개인이 아니라 기자단에서 일괄적으로 흰 봉투를 쫙 돌리거든요. 거기서 안 받겠다 버텼더니 기자단에서 제명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회사 부장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기자가 기자단에서 제명을 당하면 생명을 잃는 거라고 오히려 혼을 낸단 말이에요. 아 그러니 어쩌나. 나는 생각했죠. 사실 사람이 술 먹고 돈 받아놓고 줏대를 지키기는 어려워요. 그건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나는 그래도 최대한 쓰려고 노력했어요. 그러다보니 집 지키는 개도 음식을 받아먹으면 충성을 다한다는데, 어째 사람이 그리 의리가 없냐는 말도 들었죠. 하지만 나는 오히려 사람이니까 할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기자단과 경제부처 관계자들로부터 임 아무개는 조심해야 한다는 소문도 나고 눈총도 받고 그랬죠.”

 

조선일보 기자에 대한 의혹 풀기
우리는 간혹 ‘사상의 은사’ 리영희가 대한민국 최악의 보수, 왜곡, 편파신문이라고 할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란 것에 놀란다. 그런데 임재경도 조선일보이다. 나는 청년들이 이에 대해 매우 궁금할 것 같아 대뜸 왜 그렇게 ‘나쁜 조선일보’에 들어갔는지 물었다.


“1960년대의 조선일보는 약간의 기복은 있었지만 지금의 조선일보와는 상당히 달랐어요. 특히 김경환 편집국장과 남재희 정치부장, 리영희 외신부장이 함께 만들던 1965년 즈음의 조선일보는 꽤 괜찮았어요. 그런데 조선일보가 지금 사옥인 코리아나호텔 건물을 한일협정 이후 들어온 상업 차관으로 해결했잖아요. 차관 자체가 그 당시 엄청난 이득이고 특혜였어요. 그 이후 조선일보가 급속하게 박정희 정권에 굴복한 것이죠. 73년 초 내가 조선일보를 떠날 때, 조선일보는 정말 무기력했어요. 대통령이 쿠데타를 해서 헌법을 완전히 짓밟았는데도, 조선일보는 한마디 찍 소리도 안 했죠. 게다가 정부에서 눈 한번 찡끗하면 알아서 설설 기죠. 이런 건 빼라, 써라, 말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알아서 기는, 자기 검열수준으로 전락했죠.”

 

 

 

김대중 과도내각의 경제담당 임재경
그는 조선일보에서 73년 대한일보로 이직했다. 그가 파리 제1대학에서 경제사를 공부하고 돌아온 뒤 마주한 조선일보는 한심했다. 마침 평소 믿고 따르던 김경환 조선일보 전 편집국장이 이직을 강력하게 제안했다. 그러나 그가 큰 결심을 하고 이직한 지 두 달 만에, 대한일보는 폐간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미움을 샀기 때문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74년에 그는 한국일보 논설위원 옮겨갔다. 하지만 1980년 7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연루되어 한국일보에서 해직되고 투옥되었다.


“내가 박정희 정권 당시 김대중 씨를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나 자신이 정치를 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다가 언론인 신분이니, 그건 그저 호감 이상은 아니었어요. 72년에 김대중 씨와 두어 차례 자리를 같이 한 적은 있지만, 그 이후로는 7~8년간 대면조차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한화갑 씨가 논설위원실로 찾아와서 ‘김대중 선생’과 경제 문제에 관해 토론하고 글을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당시 난 한국일보에 내는 인터뷰라면 몰라도, 단행본을 내는 용도의 글은 쓰지 않겠다고 거절했어요.
그 이후 전두환 쿠데타가 나고,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이 터졌어요. 그런데 아침에 신문을 보니 김대중이 과도내각을 형성하려고 했는데 경제담당이 임재경이라고 하는 거라.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중앙정보부의 과장이라는 사람이 시나리오를 쓴 거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막 옥죄이면서 네가 사주해서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지? 목적이 뭐냐? 정권 장악이지? 이를 위해 과도 내각을 세웠지? 그러다가 고대 교수로 재직 중인 이문영 씨 수첩에 적힌 김대중 인터뷰 계획서를 이용해 과도내각 정부를 조작한 거죠.” 

 

언협을 만들며 언론민주화 운동을 시작하다.
감옥에서 나온 뒤 하버드 대학에서 1년간 공부를 하고 돌아온 그는 83년 봄, 해직언론인들과 언협을 기획했다. 고 성유보는 <한겨레>에 기고한 ‘길을 찾아서’에서 언협 창립을 이렇게 회고한다. “동아투위의 고 이병주 위원장과 이부영 위원 그리고 나, 조선투위의 최장학 위원장과 정태기·신홍범 위원, 80협의회의 김태홍 회장, 그리고 임재경 선생 등이 새로운 언론운동단체를 함께 만들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임재경은 창립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참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했어요. 언협 생각하면 역시 86년 <말>지의 보도지침이 떠오르죠. 그 당시 보도지침이 있다는 것은 모든 언론인이 다 아는 사실인데도 이걸 어디서도 기사화하지 못했잖아요. 그걸 김주언 기자가 가져왔는데, 막상 언협도 이걸 폭로하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걸 폭로하면 어렵게 만든 언협과 <말>지가 한방에 무너진다는 우려가 컸죠. 그때 강하게 폭로를 주장한 사람이 성유보와 신홍범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잘 한 거죠. 보도지침은 언론운동뿐 아니라 당시 민주화 열기에 큰 영향을 줬잖아요. 그걸로 다들 고생했지만, 만약 보도지침 없었더라면 언협은 참 무덤덤했을 것 같아요.”


그는 새삼 <말>지의 숨은 일꾼을 언급했다.


“보도지침은 을지로 백병원 뒤 활판 인쇄소에서 찍었어요. 그런데 그걸 전국에 발송하고 책방에 배달해야 하잖아요. 그 시절엔 이게 엄청 위험한 일이었어요. 그런데 김판수 라는 분이 <말>지를 자기 차 트렁크에 실어서 배달하는 임무를 해줬어요. 그건 정말 보통 희생이 아닌거에요. 더군다나 당시 그는 간첩조작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전과를 가진 사람이었거든요. 억만금을 줘도 못하는 일이야. 민언련은 이런 사람을 꼭 기억해야 해요.”


민언련은 지난해 12월 19일 30주년 창립기념식에서 김판수 선생께 감사패를 드렸다. 이렇게 전설 같은 분들의 활약이 모여 군사 정권의 언론검열인 보도지침은 폭로되었고, 당시 김태홍 사무국장, 신홍범 실행위원, 김주언 기자는 구속되었다. 임재경은 이후 언협의 실행위원으로 세 사람의 재판 대응을 주도했다. 특히 외국어에 능통한 그는 외신 홍보까지 도맡았다. 그는 이후로도 민언련 고문과 이사 등을 맡아 언론운동의 큰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한겨레를 만들다.
우리는 인터뷰 장소를 한겨레신문사로 정했다. 그와의 만남 장소를 굳이 한겨레로 정한 것은 ‘임재경’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 그가 2008년 한겨레에 연재한  ‘임재경의 길을 찾아서’의 첫 문장도 한겨레 창간이었다. 특히 그는 한겨레 창립기금을 구하러 다니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길을 찾아서’에서 “내가 새 신문을 만드는 일에 할 일이 있다면 악역과 인욕이라고 결심했다.”라고 밝혔다. 누구든지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싫은 법인데, 그가 발 벗고 간청 반 투정 반으로 모은 자금들은 한겨레 창립에 주춧돌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그에게 팔십 평생 가장 보람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건 최고의 우문이다. 그래도 굳이 물었다. 


“한겨레죠. 한겨레는 한국 역사는 물론이고, 동시대, 전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든 신문이에요. 물론 한겨레보다 더 멋지고 좋은 신문을 만든 경우는 있겠지만, 이렇게 오랜 시간 창간 취지를 이어가며 성장하지는 못했다고 봐요. 올해 26년이 된 한겨레가 완전히 만족스럽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한겨레 창간 주역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 나에겐 가장 큰 보람이죠.”


‘임재경’하면 가장 대표적 직함으로 언급되는 한겨레신문 초대 부사장, 그것은 결코 허투루 붙여진 것이 아니다. 새 신문을 만들어내겠다는 발상부터 돈을 걷고 신문을 만들고, 취지를 이어가기 위해 보낸 그의 50대는 어쩌면 가장 꿈같은 시간이었으리라. 그렇다면 반대로 가장 후회되는 것은 무엇일까.


“후회되는 거 많죠.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나이 든 사람이 너무 후회만 늘어놓는 것도 좋지는 않아요. 그래도 내가 오늘 꼭 말하고 싶은 건 하나 있어요. 이건 지극히 사적인 건데. 바로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이에요. 그 시절이야 집사람 고생시킨 거는 다들 비슷한 처지라 할 수도 있지만, 나는 특히 자식들 어린 시절에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했어요.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닌데, 내가 해직도 당하고 교도소에도 잠깐 갔다 오고 그런 과정에서 맘이 급해 가지고… 자식 놈 손목 잡고 짜장면 하나를 못 사줬어요. 어렸을 때는 짜장면 집 가는 게 그렇게 좋다는데, 그걸 못해준 게 가장 후회스러워요.”

 

 

임재경은 인복이 많다.
가족과 함께하지 못한 그 시간에 임재경은 무엇을 했을까? 그는 언론인 중에서도 발이 넓기로 유명하고, 좋은 지인과 좋은 일을 많이 만들어내는데 일등인 사람이었다. <오마이뉴스> 대표 오연호가 <말>지 기자일 때, 그에게 “자유언론과 민주화 운동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는 “글쎄… 내게는 교우관계가 제일 큰 영향을 준 것 같은데”라며 즉석에서 ‘리영희, 남재희, 백낙청’을 언급했단다. (임재경의 ‘길을 찾아서’에서)  그에게 친구에 대해 물었다.


“나의 삶에서 친구는 정말 중요한 의미가 있죠. 사람이면 누구나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지만,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나는 뜻이 맞는 사람들과 자주 의견을 나누고 좋은 친분을 쌓았어요. 그것이 자유언론투쟁을 하고 언협을 만들고 한겨레를 창간한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 된 거죠. 나만 외로운 결단을 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이 있었고, 그들과 맘을 모았기에 실행을 할 수 있었던 거죠. 만약 그런 친구들이 없었다면 난 아마 그런 일들은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조선일보에 있을 때도 김경환, 리영희, 남재희와 함께 일하면서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죠. 또 한국일보에서 해직된 이후에도 백낙청, 박윤배, 채현국 등이 생계에 도움을 많이 줬어요.
요즘도 그래요. 팔순 기념 출판기념회를 열어준다고 신홍범이 나서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내가 해준 것도 없는데…그리고 요즘 내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이라는 걸 하고 있어요. 사무실에 나와서 회장이신 김자동 선생과 함께 점심 먹고, 이야기 나누고 산책하고, 신문 보고 그렇게 지내요. 김자동 선생은 독립운동가 후손이고 민족일보 기자를 지낸 ‘진짜 원조 언론인’인데요. 나이 먹어서 이렇게 갈 곳이 있고, 함께 소일하는 분이 있다는 것도 참 굉장한 행운인거에요.”

 

임재경은 11월 2일 6시에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팔순기념 출판기념회를 연다. 책은 그와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온 <창작과 비평>에서 나온다. 인터뷰를 위해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많이 웃고 감동했다. 그의 글은 옛이야기를 듣는 달콤함과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쾌감을 준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자신의 부끄러움과 자만심까지도 그대로 드러내는 그의 진솔함과 당당함이었다. 그 세대의 분들이 모두 일제강점기, 해방, 전쟁, 독재 정권을 경험했겠지만, 누구나 그처럼 한 평생 동안 세상과 자신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공부하고 성찰하며 꾸준하게 성장하는 품성과 끈기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런 그를 만날 수 있는 책이 나온다니 그것만으로도 기대가 된다. 그의 출판기념회는 민언련은 물론, 그가 초대 부사장을 역임한 한겨레 등 많은 이들에게는 의미 있는 행사가 될 것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후배 언론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을 물었다.  

 

“긴 얘기 해봐야 소용없어요. 난 한마디만 하고 싶어요. 기자는 단순한 월급쟁이가 아니라 공공성을 추구하고 공공적인 일을 하는 존재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