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1990년 8월 어느 여름날의 기억
김택수 이사, 법무법인 정세 변호사
1990년 8월이니까 벌써 25년 전의 얘기다. 언협의 기관지 격인 『말』지가 1989년 정기간행물 등록을 한 후 한참 낙양의 지가를 올릴 때였고, 언협은 문간방 신세를 지고 있었다. 월간 『말』 7월호에 실린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 그 역사적 진실」이라는 외부기고문에 항의하는 따이한중앙회의 집회, 시위로 기자들은 며칠을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다. 1990년 8월 2일 자 연합통신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보도했다.
“1일 2시 40분께 월간 「말」사무실 앞길에서 7월호 「말」지의 월남참전 관련 기사에 불만을 품고 8일째 농성을 벌이던 따이한중앙회 회원 10여 명이 이 잡지 8월호를 발송하기 위해 회사 밖으로 나오던 직원 권오선 씨(29) 등 2명을 폭행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회원들은 최 대표의 집을 찾아가 “박살내겠다”는 등 폭언을 하며 8월호 「말」지 2백여 권을 빼앗았다가 5분 만에 되돌려 줬다. 따이한중앙회 회원들은 「말」지 7월호에 게재된 재미언론인 김민웅 씨(34)의 기고문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 그 역사적 진실’에서 ‘한국군의 월남 민중 학살이 유신과 광주학살에 이어진다고 기술한 것은 명백한 명예훼손’이라며 「말」지 7월호의 전량 수거와 4대 일간지 등에 사과문 발표 등을 요구하며 지금까지 말지 사무실 앞에서 농성을 벌여왔다.”
“당신들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를 뿐이다”
그 당시 대부분의 말지 기자들은 혈기방장한 20대 약관의 나이였고, 따이한중앙회 회원들은 50대 아버지뻘쯤 되는 나이였다. 기자들이 직접 나설 수도 없어 결국 최장학, 심재택 두 해직언론인 선배가 대화의 돌파구를 찾아 나섰다. 그동안의 분기탱천한 시위행태로만 보면 과연 대화할 수 있을까도 의문이었고, 혹시나 폭행사태라도 벌어지면 큰일 난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고 심재택 선배는 놀랍게도 대화와 협상에 있어 유불리를 따지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 대표들이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올 수 있는 장소로 조선일보사가 있는 코리아나호텔에서 만날 것을 제안했다. 최장학, 심재택 두 대표는 진지하게 듣고 정확하게 답변했고, 상대방이 갑자기 흥분해 컵에 있던 찬물을 끼얹으며 두 선배에게 고함을 질렀지만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그날의 만남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따이한회의 농성도 마무리되었다. 심재택 선배는 “당신들의 경험과 생각을 존중한다”는 뜻에서 코리아나호텔을 제안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우리의 경험과 생각이 있다”는 설명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찬물은 “당신들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를 뿐이다”는 대목에서 뿌려졌다. 사실 이날의 협상은 심재택 선배가 코리아나호텔에서 보자고 제안하고, 따이한중앙회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이미 결정된 승부였다.
안녕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대한민국의 우리
얼마 전 민언련 3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지금 『말』지는 가고 없지만, 민언련은 이미 청년기를 넘어서고 있다. 당시 기자들은 50대의 나이에 들어섰고, 해직언론인 선배들은 벌써 70대의 나이다. 위로는 선배를 모시고, 아래로는 후배를 챙겨야 하지만 50대의 나이에도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가 1위, 대학생들이 가장 존경하는 만화가 분야 선호도 1위인 이현세 씨는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완고하고 힘도 세고 강력한 집단인 5~60대가 지금의 20대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이 사회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대학생들은 안녕하지 못한 현실을 비꼬며 “안녕들하십니까”라고 묻는다.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기자가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 이유도 우리가 행복하지 않다는 현실인식을 바탕에 깔고 있을 터다.
지금 대한민국의 우리는 안녕하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던 박근혜 대통령 집권 2년 차의 ‘행복성적표’는 여전히 초라한데, 앞으로 더 나아질 희망도 없다. 국민통합시대를 열겠다는 약속도 까마득히 잊혀진지 오래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선출된 권력의 ‘숨은 목적’을 찾아내 거리로 내쫓는 공안통치, 공작정치가 횡행하는 국민분열의 시대로 돌아가 버렸다. 상황이 이럴진대 상당수 국민은 야당을 국민불행과 분열의 역주행을 저지할 수 있는 대안수권정당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새해 벽두부터 당 대표 선출을 위한 전당대회 레이스가 벌어지고 있지만, 술자리 안줏감으로 회자되지도 않을 정도로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
‘진짜 진보’와 ‘진짜 보수’의 대결을 기대하며
여야 모두 ‘거짓말’의 덫, 신뢰의 위기에 빠져버렸고, 이를 비판하고 감시해야 할 언론도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 믿고 믿음을 주는 신뢰의 경쟁이 아니라 속고 속이는 불신의 경쟁에서 누가 살아남느냐의 게임을 보는 듯하다.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하거나, 우측깜빡이를 켜고 좌회전을 하면 남는 건 죽음의 레이스뿐이다. 약속을 지키고 그 약속을 신뢰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필요최소한의 조건이다. 저마다 더 많은 보수(保守), 더 많은 진보(進步)를 말하지만, 그것이 꼭 국민행복과 국민통합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존엄과 안전을 위협하는 군림과 불통, 오만과 무능을 뛰어넘는 일이다. 상대를 존중하면서도 당당한 ‘진짜 진보’와 협상에는 찬물을 끼얹지 않는 ‘진짜 보수’의 맞장 대결이 보고 싶다. 그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