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_
[언론노조 성명] 이인호 씨는 자진 사퇴하고 청와대는 임명시도를 중단하라이인호 씨는 자진 사퇴하고 청와대는 임명시도를 중단하라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는 15세기 말 이탈리아의 외교관이었다. 조국통일과 외세축출을 염원하던 그는 당시 혼란스런 시대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는 ‘사자의 힘과 여우의 꾀’를 갖춘 절대군주가 필요하다며 군주가 갖춰야 할 조건들을 제시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모델로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교황 알렉산드르 6세’를 들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르 6세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는 이렇다. “그는 사람들을 어떻게 기만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뒀으며, 사람들이 매번 기만당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알렉산드르 6세만큼 모든 일을 확실하게 약속하면서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세상사의 이런 면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그의 기만은 항상 효과를 거두었다” 이런 내용 때문인지 <군주론>은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에게는 애독서가 되기도 했다.
<군주론>이 출간된 지 5세기가 지난 지금. 대한민국으로 와 보자. 당시 이탈리아처럼 분단된 국가이고, 열강이 각축 틈바구니에 끼어있다. 하지만 5세기 전 이탈리아 상황과는 분명히 다르다. 민주주의 헌법과 국가질서가 엄연히 존재한다. 이를 지키고자 하는 민주시민이 절대 다수다. 군주나 봉건영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돌아가며 국민의 뜻을 대행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불행하게도 지금 대한민국에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통치교과서로 삼는 듯 한 절대 권력자를 보고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이다. 군주론에 등장하는 알렉산드르 6세처럼 지금 박 대통령은 기만술을 통치의 원칙으로 삼는 듯하다. 후보시절 그렇게 확실하게 약속했던 공약들은 당선이후 대부분 버려졌다. ‘경제민주화’, ‘검찰개혁’, ‘전시작전권 환수’, ‘복지정책’ 모두 폐기, 축소, 연기되었다.
언론관련 공약도 마찬가지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는 “언론은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할 방법도 없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언론, 특히 공영방송을 장악하고 길들이려는 정권의 의도와 시도는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9월1일 KBS의 새 이사로 70대 고령의 원로 역사학자 이인호 씨를 추천했다. 임기 1년 남은 이길영 전 이사장이 돌연 사퇴하더니 방통위 여당 측 위원들은 준비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야당 측 위원들을 배제한 채 표결을 강행했다. 연장자 우선 관행에 따라 올해 78세인 이 씨는 곧 KBS이사장 자리를 노릴 것이다.
이인호 씨가 누구인가? 일각에서 이 씨는 ‘제2의 문창극’, ‘여자 문창극’으로도 불리고 있다. 이 씨는 식민 지배를 미화한 문 씨의 교회 강연에 대해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감동했다”고 옹호했다. 문 씨 발언을 보도한 KBS보도를 접하고는 “이런 나라에서 살기 싫다”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보수적 역사관에 비춰봐도 친일지배를 옹호하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대한민국 원로인사가 갖춰야할 역사인식의 품격도, 민주주의 사회의 언론 역할에 대한 기본인식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또는 누군가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서 인지 이 씨는 KBS 이사로 추천됐다.
어디 이인호씨 뿐인가. 이에 앞서 대표적인 뉴라이트 계열 학자이자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출신인 박효종 씨도 방송통신심의위원장에 임명됐다. 박 씨 역시 ‘5·16쿠데타’ 에 대해 수차례 ‘구국의 혁명’ 이라고 평가하는 등 박근혜 대통령에게 노골적인 구애(?)를 한 인물이다. 가장 중립적, 공정해야할 언론기관의 수장 자리에 일반적인 대한민국 국민의 역사인식과는 동떨어진 인물들이 박 대통령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연이어 낙하산으로 내려가고 있다. 방송장악을 할 수도 없고 할 방법도 없다던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묻고 싶다. 도대체 이인호 씨의 어떤 자질이 공영방송 KBS의 이사장에 부합하는가? 이 씨의 이사추천에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정말 개입하지 않았는가? 이 씨를 추천한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은 누구의 추천 또는 지시를 받았는가? 꺼릴 것이 없다면 대답 못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느 누구로부터도 합리적인 해명은 듣지 못했다.
다시 <군주론>으로 돌아가자. <군주론>의 참 해석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조건들을 갖춘 군주가 민중들을 지배하려 할 것이니 민중들에게 그런 군주를 경계하라는 의도로 쓰였다고 해석되고 있다. 군주가 통치하던 시대가 아닌 지금에도 <군주론>이 다시 고전으로 읽히는 진정한 이유다. 우리는 박근혜 정부의 통치술이 <군주론>을 오독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렇게 믿을 만한 증거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박효종 씨에 이어 이인호 씨까지 언론기관 수장에 앉히려는 현 정권의 노골적 의도는 마치 <군주론>에 등장한 “알렉산드르 6세‘ 가 다시 대한민국에 등장하는 듯하다.
늦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가 3년 반 후 국민들의 박수를 받고 임기를 마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다. 이인호씨는 스스로 사퇴하라. 청와대 역시 이인호씨 임명시도를 중단하라. 또한 박근혜 정권은 당장 <군주론>의 오독에 기반을 둔 듯한 통치를 멈추기를 바란다. 대한민국에는 더 이상 군주도 없으며 국민도 통치의 대상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고 언론은 권력이 아닌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군주론>등장한 알렉산드르 6세, 그리고 <군주론>을 오독하던 히틀러, 그리고 무솔리니까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으며 냉혹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다.
2014년 9월 2일
전국언론노동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