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조중동 바깥의 '새로운 힘' - 성한표 회원 (2014년 6호)
등록 2014.06.25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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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 바깥의 '새로운 힘'




1975년 3월 6일. 조선일보 기자들은 박정희 유신정권과 한통속이 된 신문사 간부들의 보도 통제에 맞서 제작 거부 농성에 들어갔다. 이미 기자 두 명이 부당하게 해고된 지 오래였고 해고자들을 복직시켜 주겠다는 간부들의 약속마저 휴지 조각이 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언론 자유를 외친 죄밖에 없는 기자들을 위해 사측이 준비해 놓은 것은 다름 아닌 ‘대량 해직’이었다. 그해 조선일보사에서만 기자 30여 명이 거리로 내몰렸고 해직 기자들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를 만들어 복직과 언론 자유를 위한 싸움을 이어 갔다. 조선투위 위원이었던 성한표 회원을 만나러 광화문으로 가는 길에 나는 책으로만 접한 한국 언론운동사의 한 갈피를 나도 모르게 더듬어 보게 됐다.



기자라는 직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것만 같은 건축학과 출신이 어떻게 기자가 됐는지 성한표 회원은 조근조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도면에 스케치를 하거나 건물을 디자인하는 일에 전혀 소질이 없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 진로에 대해 걱정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대학신문에 우연한 계기로 두어 번 글을 쓰면서, 이런 일은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리고 그 당시 전공과 상관없이 시험을 쳐서 취직할 수 있는 곳은 언론사밖에 없기도 했어요. (웃음)”


그렇게 성한표 회원은 1969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가 되었다. 처음 일이 년 동안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일에만 매달리며 눈 코 뜰 새 없이 돌아가는 신문사 분위기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 언제 어떤 계기로 성한표 회원은 세상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을 지니게 되었을까?


“사회부 시절 제 관할구역 중 하나가 서울대학교였어요. 서울대 학생들은 그때 한창 박정희 정권에 맞서서 데모를 많이 하던 시기였는데요. 서울대 쪽을 취재하면서 저 스스로 의식화가 이루어진 것 같아요. (웃음) 사회부에서 2년 있다가 정치부로 가서 국회에 출입하게 되었는데 또 그때가 모처럼 야당이 많이 진출해 국회가 굉장히 활발하던 시기였거든요. 대학생들의 싸움, 그리고 국회 안에서의 싸움을 겪으며 우리 사회 가장 첨예한 갈등을 취재하고 보도하고 거기다가 내 주장도 담고 하는 동안 저도 모르게 기자로서의 의식이 여물기 시작하지 않았나 싶어요.”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며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에 정면으로 들고일어났다. 동아와 조선에서 시작된 움직임은 삽시간에 전국 언론사들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1975년, 선언에 참여한 기자들이 무더기로 거리에 내몰렸고 해직기자들을 중심으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와 조선투위가 결성됐다. 


“1975년이면 제가 30대 초반이었고 기자 생활을 6, 7년쯤 했을 때였어요. 자연스럽게 제 나이 또래 친구들이 주동이 될 수밖에 없었죠. 74년 10·24 선언 이후 연말에 신홍범 백기범 기자가 유신정권의 입장에서 쓴 칼럼에 대해 편집국장한테 문제를 제기하다가 해직당했고, 저희는 두 기자의 복직과 공정 보도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어요. 3개월 뒤 복직시켜 준다고 해서 농성을 풀긴 했는데 3개월 뒤에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결국 75년 3월 6일 다시 농성에 들어갔죠. 그러다가 결국 저를 포함한 30여 명이 해직되었습니다.”


조선일보에서 쫓겨난 뒤 성한표 회원은 1988년 <한겨레> 신문 창간에 힘을 보태게 될 때까지 12년 동안 이런저런 적잖은 일들을 하며 지냈다고 했다. 


“<한겨레>가 처음 만들어질 때는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 해직(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탄압으로 대량해직된 언론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단체) 이렇게 세 단체가 중심이었어요. 해직기자들끼리는 다 알고 지냈으니까 함께 모임 하면서 ‘우리도 신문을 하나 만들자’는 발상을 떠올리게 됐고 그렇게 얘기를 진행시키다가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 거죠. 창간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87년 대선이 끝나고부터였습니다.”


<한겨레> 창간 당시엔 각 부서별로 ‘부장’이라는 이름 대신 ‘편집위원’이라는 말을 썼다. ‘국장’은 ‘편집위원장’으로 불렸다. 부장과 국장은 ‘옛 신문 시스템의 비민주적인 관행’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공감대가 <한겨레> 내부에서 있었다고 했다.


“한겨레에 들어가서는 정치경제부 편집위원을 했어요. 기존 신문에는 ‘정치’가 과잉돼 있다고 생각해서 정치의 비중을 줄이자는 뜻으로 이름을 ‘정치경제부’라 했죠. 정치경제부 데스크에 있으면서 골치 아픈 일이 굉장히 많았어요. 첨예한 사회적 갈등도 젊은 기자들의 주장도 전부 감당해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그게 참 보람되고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다른 신문들은 그때 북한 보도를 하면서 ‘북괴는 이러저러하다고 생떼를 썼다’고 기사를 썼지만 우리는 ‘북한이 이러저러하다고 말했다’고 썼거든요. 그 작은 차이 하나가 알고 보면 참 컸어요. 그러니 그 골치 아픈 와중에서도, 내가 하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정말 중요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들이 있었죠.”


성한표 회원이 사회부 편집위원으로 자리를 옮기고 난 어느 날, <한겨레>는 조선일보와 똑같은 화젯거리를 특집으로 다루며 경쟁 아닌 경쟁을 벌이게 된다. 


“90년대 초 전세난이 극심했을 때가 있었어요. 근데 조선일보와 한겨레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세난 특집기사를 시작했죠. 같은 이슈를 놓고 한겨레의 시각과 조선일보의 시각이 맞붙은 거였어요. 한겨레가 40회쯤 끌었던 반면 조선일보는 20회쯤에서 끝냈는데요. 나중에 후일담을 들어보니 조선일보 쪽에서 ‘전세 대란 같은 건 우리보단 한겨레에 더 맞는다’ 하며 중간에 포기했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한겨레 기자들이 그렇게 가난하게 살지는 않았는데. (웃음)”


이후 성한표 회원은 <한겨레>의 편집위원장, 논설위원, 논설주간, 부사장을 차례로 거쳤고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는 SBS 사외이사로 있으면서 SBS 뉴스 비평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 언론인 인생은 조선일보, 한겨레, SBS 이렇게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는데요. 조선일보에서 실무적인 훈련을 받았다면 한겨레에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신문이 뭘까 고민하며 신문을 만들었고 SBS에서는 사외이사 자격으로 뉴스 비평을 썼죠. 사외이사 그만둔 뒤에도 한 7년쯤 계속 뉴스 비평을 썼어요.”



그러면 성한표 회원의 인생 제 4기는 지금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을까? 


“지금은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제가 기자도 해 보고 편집위원장도 해 봤지만 사진에 대해서는 그간 관심도 없었고 이해도 못했었거든요. 사진은 미술적인 감각이 필요한 건데 제겐 통 그런 게 없었어요. (웃음) 그런데 이것저것 다 끝내고 나서 이젠 뭘 하며 살아야 할까 고민하다가 사진기를 손에 쥐니 아, 이거다 싶었죠. 요즘은 남는 시간을 전부 사진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혼자 아무렇게나 찍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정식으로 ‘스승님’을 모시고 가르침도 받고 있다는 성한표 회원은 올 가을에 사진전도 열 생각이라고 했다.


“사진전 주제는 ‘소’예요. 요새 소들은 고기소들 말고는 마치 실업자들처럼 일거리가 없잖아요. 소가 유일하게 제대로 대접받는 곳은 ‘소싸움’판 말고는 없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소싸움부터 찍기 시작했죠. 그렇게 하다 보니 소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거나 소의 시선으로 소를 보는 작업을 하게 됐어요. 작업명은 ‘황소의 빼앗긴 꿈’ 정도로 하면 어떨까요? (웃음)”


‘기레기’라는 말이 기자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는 요즘, 한국의 언론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고 물었다. 회원 인터뷰를 할 때마다 늘 던지는 물음이지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 회원은 지금껏 하나도 없었다. 성한표 회원 역시 굳은 표정으로 한참을 생각하다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과거 같으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제작 거부 농성이 벌어지고도 남을 상황이 바로 지금이에요. 예전에는 언론 탄압도 극심했고 기사 잘못 썼다간 끌려가서 치도곤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언론사 내부에 어떤 ‘역동성’이라는 게 있었어요. 독재정권이 언론사들을 지원하지만 않았다면 그 당시 기자들의 싸움이 승리할 수도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언론사들의 시스템이 고착화되어 있어서 제작 거부 농성 같은 건 벌어지기 힘든 분위기예요. 역동성도 유연성도 내부 활력도 전혀 없으니 변화를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한 마디로 예전보다 언론 상황이 더 나빠진 거죠. KBS에서 길환영 사장이 물러났다지만 조중동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KBS와는 달라요. KBS는 사용자 한 명이 영원히 지배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거든요. 정권이 바뀌면 사장도 바뀌니까요. 조중동의 시스템은 그렇지 않죠. 그래서 언론개혁운동도 예전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해야 합니다.”


그렇다. 누구에게 물어보든 우울하기 그지없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내가 회원 인터뷰를 진행할 때마다 거듭 같은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서로 다른 이들의 서로 다른 희망을 어떻게든 끄집어내 기록하고 싶기 때문이다. 성한표 회원은 이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상황이 더 나빠졌으니 포기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민주언론, 진보언론을 외치고 그것에 헌신하겠다는 사람들은 조중동 내부에는 없겠지만 바깥에는 우리 생각보다 많아요. <한겨레>, <경향>의 젊은 기자들이나 여러 언론단체들처럼 새롭게 샘솟는 힘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런 힘들을 모아 내서, 역동성이 떨어진 거대 신문들과 맞설 수 있는 힘으로 키워야 하는 거죠. 그리고 그 역할을 민언련과 회원들이 해야 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꾸준히 씨앗을 심고 물을 주고 볕을 쬐며 나아가야겠죠.”


누군가와 약속이 있다는 성한표 회원은 인터뷰를 마치고 영풍문고 쪽으로 갔다. 나는 다시 민언련 사무실로 가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 쪽으로 걸어갔고 서대문 쪽으로 발길을 돌릴 즈음 저쪽에 음흉스럽게 버티고 있는 동아일보사 건물을 보았다. 건너편에는 기름진 조선일보사 건물이 있을 것이었다. 


동아투위와 조선투위가 결성된 지 어느덧 40년이 흘렀다. 4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는 살이 뒤룩뒤룩 찐 돼지가 되었고 놀랍게도 살은 아직도 찌고 있는 중이다. 저들도 언젠가는 빵! 하고 배가 터져 죽게 될까? 혐오감과 증오가 뒤섞인 감정이 잠깐 동안 내 속을 휘젓고 다니다가 사라졌다. 성한표 회원이 말한 ‘조중동 바깥의 새로운 힘’에 나의 그런 감정도 포함된다면, 그리고 만일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런 이들을 대체 어떻게 찾아내서 어떻게 끌어들여야 할까? 끌어들인 다음에는 또 무엇을 해야 할까?


잠시 멈춰 서서 담배를 한 대 피워 물었다. 바삐 오가는 자동차들 사이로 ‘채널A’ 간판이 보였다. 환한 햇살 아래 반짝이고 있는 저 거대한 성채에 주눅들지 않는 것에서부터 일단 시작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