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해 줄 수 있어 (2014년 1호)
등록 2014.01.2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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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여전히 사랑해 줄 수 있어

 

한효진 회원 l oceanchild@hanmail.net

 

 

러닝타임이 긴 영화는 감독이 편집 능력이 없는 거라고, 난 내 집중력을 탓하기 보다는 감독 책임으로 떠넘기며 2시간이 넘는 영화는 그동안 피해왔다. 그러던 지난 2013년 12월 31일 종무식으로 오전 근무만 마친 날 그대로 퇴근하기 아쉬워 후배의 설득으로 이 영화를 보게 됐다.


상영하는 곳도 많지 않았고 제목만 들어봐도 딱 ‘어떤 한 사람의 이야기’라는 견적이 나왔다. 평일 벌건 대낮에 후배랑 단 둘이 앉아 3시간이나 버텨야 할 것이라 예상하며 별 기대감 없이 상영관으로 들어섰다.

 

몬트리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소설을 쓰는, 얼굴도 꽤 훤칠하고 능력도 있는 로렌스와  독특한 감성과 열정 넘치는 CF 감독 프레드는 죽이 아주 잘 맞는 커플이다. 여느 연인 사이가 그렇듯 그들만이 알 수 있는 금지 리스트를 만들기도 하며, 함께 울고 웃으며 그렇게 서로를 아껴왔다. 그러던 중 로렌스가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이한 어느 날 프레드에게 그동안 숨겨왔던 비밀을 고백한다. 남은 일생을 여자로 살고 싶다고.

 

영화 첫 장면에서 프레드는 로렌스에게 오늘 무엇을 입을 것이냐고 묻는다. 로렌스는 아무것도 입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이 영화에서 옷은 중요한 매개체로 등장한다. 애정, 갈등, 도피, 행복 등 상황에 따라 프레드와 로렌스가 입고 있는 옷 색과 패턴으로 영상에 감각을 더한다. 로렌스가 여성으로서 첫 세상에 발을 디딜 때에도 스타킹을 신고 치마를 입기 시작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남성과 여성. 이 세상에 성(性)은 단 두 가지밖에 없지만, 세상에는 정말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다. 또 그것의 성격을 드러내는 요소 중의 하나로 우리는 서로 다른 옷을 입으며, (심지어 같은 옷을 입고 마주쳤을 경우 상당히 민망하며 불쾌한 기분이 들 만큼) 우리는 남성과 여성 그 이상의 구분을 떠나 한 구성원으로서 타와 다르게 구별되길 바라는 본능이 있다. 로렌스 역시 그쯤의 하나로 프레드가 이해해주고 받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잠시 갈등을 겪지만 결국 여자 로렌스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프레드, 그러나 직장을 잃게 되고 현실의 불편한 시선 속에서 하루하루 지쳐가더너 프레드는 결국 로렌스를 떠나게 된다. 로렌스 역시 그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살아가지만 여전히 프레드를 잊지 못하고 그에 관한 책을 내게 된다. 책을 보게 된 프레드는 다시 로렌스를 만나고, 그들이 가고 싶어 했던 블랙섬으로 여행을 떠난다. 도착한 블랙섬에는 형형색색의 다양한 옷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그 둘을 환영한다. 판타지적으로 쏟아지는 이미지들의 나열은 잠시나마 현실을 잊게 했다. 여기서 끝났다면, 그저 역시 영화라는 장르 안에서만 머물렀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이 둘이 만나고 헤어지기를 결국 반복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과연 우리라면, 너라면 로렌스를 여전히 사랑해 줄 수 있겠냐고.

 

영화 안에는 로렌스처럼 평생 입고 있던 옷을 바꾼 사람들이 몇몇 나온다. TV만 끼고 사는 아버지를 대신해 돈을 벌고 있는 로렌스의 어머니. 그녀는 로렌스의 이런 변화에 세상에서 받게 될 아들의 상처를 생각하며 아파하지만 결국 그를 지지해 준다. 그녀 역시 TV를 집어 던지며 아버지를 떠나 꿈꿔왔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한다. 또 레즈비언 커플로 살다가 한 사람이 남자로 수술하며 결혼해 살고 있는 커플이 있다. 겉모습이 달라졌을 뿐 서로 사랑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며 행복한 모습을 보여준다.


로렌스는 영화 말미에서 프레드에게 자신이 여자가 되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헤어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본인이 다른 옷을 입었기 때문에 헤어진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별을 언젠가는 마주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기적이면서 현실의 문제를 부인해버리는 로렌스의 모습 같지만 그러나 어쨌든, anyway, 나는 여자가 되었어도 그전과 변함없는 로렌스니까. 그렇게 프레드에게 얘기하는 것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168분이라는 긴 상영시간은 폭풍처럼 쏟아지는 화려한 이미지들과 음악, 그리고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고민해야할 문제들을 그렇게 안겨주며 순식간에 지나갔다. 여자로 살고 싶었던 한 남자가 아닌 그저 한 사람의 평범하고도 지독한 사랑 이야기 ‘로렌스 애니웨이’.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은 체력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