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수상한
S다이어리
[은상] ‘MBC PD수첩-기무사는 왜 그들을 미행했나?’ l
오슬기
여기, 한 뼘도 안 되는 작은 크기의 수첩에 빼곡하게 적힌 메모가
있다.
1월 11일 09:20~40 E마트 (내의 구입)
09:45 出 도보
10:20 이스타나
7월 22일
09:10 사무실 入
16:05 사무실 出
16:30 삼성래미안 入(버스) (111동 지하 주차장)
17:26 주차장 出
18:45 사무실 入
20:40 사무실 出
이것이 과연 무엇일까. 스토커의 집요한 기록? 아니면 흥신소 직원의 보고서? 새벽
몇 시 몇 분에 도마뱀이라는 술집에 들어간 것과 오감도라는 식당에서 불고기와 함흥냉면을 먹었다는 것, 동석자들의 얼굴을 모두 촬영했다는 메모까지
발견하고 나면 수첩의 정체는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수상한 S 다이어리
8월 12일,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한다. 바로 이 수첩의
주인공이 일주일 전 평택 쌍용자동차 관련 집회 현장에서 불법 민간사찰 중이던 기무사 소속 신모 수사관이라는 것이다.
특히 놀라운 부분은 '토의'라는 제목 아래 써져있는 '다음 주부터 경찰 동행',
'CCTV 설치건'이다.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이 경찰의 협조 아래 이루어지고, CCTV설치를 통해 실시간 감시를 계획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기무사의 대응은 재빨랐다. 기무사는 국방부 브리핑을 통해 신모 수사관은 평택역
인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는 장병들이 휴가 도중 쌍용자동차 집회에 참가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적법한 수사 활동을 한 것이라고 밝혔다.
덧붙여 신 수사관을 집단 폭행하고 불법으로 주민등록증과 수사기록 등을 빼앗아 간 시위대원들을 공무집행 방해와 특수폭행죄로 형사고발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수첩과 촬영 동영상에 등장하는 수많은 민간인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기무사, 정식 명칭 국군기무사령부가 어떤 곳인가. 1945년 군사 정보의 수집과
군내 방첩 활동을 위해 과도정부 국방사령부의 정보과로 출발한 후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로 자리를 잡으며 대단한 위세를 떨치던 기관이 아닌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바로 보안사 사령관 출신이다. 이렇듯 권력의 중심에 있던 기무사는 1990년, 민간인 1300여명을 대상으로 불법
사찰을 자행해왔다는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 후 큰 위기를 겪게 된다. 이 사건으로 국방부 장관, 보안사령관이 경질됐으며 이름마저 국군기무사령부로
바꿔야 했다.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독대(대통령 대면보고)를 폐지하면서 기무사의
전성시대는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 독대를 부활시켰고, 이렇게 민간사찰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도 기무사는 보란
듯이 내년 1월 500명 규모의 사이버방호사령부 창설을 추진하고 있다.
비겁한 침묵의 카르텔
그러나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서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이 사건보다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유력 언론사들의 침묵이다. 민언련의 논평에 따르면 조중동은 이정희 의원의 폭로 직후인 13, 14일자에 관련 뉴스를 단 한
토막도 싣지 않았다. 방송3사는 12일 메인뉴스에서 관련 사실을 보도하긴 했지만 비중이 매우 작았으며, KBS와 SBS의 경우 바로 다음날인
13일에는 아예 보도조차 하지 않았다.
군 기무사의 민간인 사찰은 군사법원법 제44조를 위반하는 범법행위다. 국가기관이
중대한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답답한 침묵을 지키는 언론사들의 행위는 국민의 알권리를 기만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의도적인 카르텔 가운데 지난
9월 15일 반가운 방송이 전파를 탔다. MBC < PD수첩>의 '기무사는 왜 그들을 미행했나?'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 한 일을 알고 있다
먼저 < PD수첩> 제작진은 메모와 동영상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찾아갔다. 지난여름 어느 날, 집 근처에서 한가로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기무사의 카메라에 찍힌 엄윤섭씨. 그의 부인인 약사 안모씨 역시 사찰
대상이 됐다. 엄윤섭씨는 2008년 민주노동당 관악을 후보였으나 총선 패배 직후 당 활동을 접고 에너지 관련 박사 논문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
부부는 현재 불면증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기무사의 촬영 테이프에 등장하는 또 다른 사찰 대상자들. 민노당과 관계없는
10여명은 지난 1월 8일, 동화작가 김향수씨의 책 출판을 축하하는 자리에 동석했다가 집요한 사찰을 당했다. 이들은 모두 일본 민족학교에 책을
보내는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 내 북한 국적을 가진 아이들이 다니는 민족 학교에 책을 보내는 이
'재일 민족학교 책 문화 교류 사업'이 기무사의 사찰을 받아야 할 만큼 의심스러운 것일까? 놀라운 사실은 이 사업이 2007, 2008년 서울시
우수 사업으로 선정된 일종의 국책사업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서울시는 한 책자에서 이 사업이 '책으로 전하는 민족사랑'이라며
추켜세웠다.
기무사는 9월 1일 두 번째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재일 조총련 학교와 교류
사업을 하는 민간단체 관련자를 불법적으로 시찰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실정법 위반자인 해외 거주자 A씨와, 그와 접촉 연락 중인 장병
B씨에 대한 증거 수집을 위해 검찰과 법원 승인 하에 이뤄진 수사라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위에서 언급된 실정법 위반자 A씨로 추정되는 조총련계 재일 교포 이모씨는 자신이
위반했다는 실정법이 무엇인지 궁금하고 답답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함께 책 보내기 사업에 참여했던 사람들 또한 자신들은 어린이도서협회 관계자들과
민족학교를 방문할 때 정부에 신고를 했고, 사회문화교류 담당자로부터 다음에는 굳이 신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답변을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 PD수첩>은 기무사 측에 적법한 절차에 따른 수사였다는 근거자료를
요구했다. 그러나 기무사는 공문을 통해 자신들은 모든 적법한 절차를 거쳤으며 피의사실공표죄, 공무상비밀누설죄 준수 의무가 있으므로 취재협조에는
응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혹여 사찰 대상자들이 실정법에 저촉할 만한 일을 했다고 해도 기무사의 행위는 용인될 수 없다. 민간인이 대상이기
때문에 국정원이나 경찰에 알려 함께 갔어야 하기 때문이다.
파놉티콘, 그 치졸한 원형감옥
이정희 의원의 폭로 후 어느덧 3개월. 진실이 밝혀질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주요 언론에서도 끈질긴 침묵으로 일관하며 사건을 묻는데 한 몫 하고 있다. 특히 방송 3사의 시사프로그램 중 기무사의 민간사찰을 자세히
다룬 것은 오로지 <PD수첩>뿐이었다. 공중파 방송으로서 감시와 비판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게을리 해 우리의 기대와 신뢰를 저버린 다른
시사프로그램들은 따끔한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
시민단체에 대한 국정원의 민간사찰 의혹을 폭로한 박원순 변호사는 국정원으로부터
2억 원의 소송을 당하고, 국정원은 인터넷을 패킷으로 감청하고, 경찰은 과거의 연좌제를 떠올리게 하는 '공안사범 조회 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나라의 '세계 언론자유 지수'는 1년 새 22등급이나 폭락해 69위를 기록했다.
이제는 국가기관도, 경찰도, 언론도 믿을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 일상이 파놉티콘
감옥과 같을 민간사찰 피해자들은 어디에 억울함을 호소해야 할까.
이런 와중에 옛 기무사 터에서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서의 본격적인 탈바꿈을 알리는
'신호탄'전이 진행 중이다. 군사문화와 권위주의의 대명사였던 기무사가 시민들에게 휴식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미술관이 된다니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곧 옛 기무사 터의 담장이 설치미술작품으로 새롭게 단장된다는데, 기무사와
언론은 언제가 돼야 진정한 새 단장을 할 수 있을까. 치졸한 원형감옥과 비겁한 침묵의 카르텔이 사라지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