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_
대법원 진상조사단 ‘신 대법관 재판개입’ 발표 관련 조선일보 보도에 대한 논평(2009.3.17)진상조사단의 발표는 ‘면죄부 조사가 될 것’이라는 세간의 전망과는 달랐으나, 몇 가지 측면에서 여전히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상조사단은 신 대법관의 개입이 실제 판결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이용훈 대법원장의 개입 의혹도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또 작년 10월 신 대법관이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을 만나 조속한 위헌심판을 요청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밝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이번 조사결과가 사법부 내부의 반발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 신 대법관을 잘못을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수준에서 파문을 매듭짓기 위한 ‘고육책’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보수적인 대법원조차 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을 “사법부의 독립을 저해할 수 있는 중차대한 문제”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 대법관은 사퇴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끝까지 신 대법관의 재판개입을 ‘관행적인 사법행정권’이라고 강변하면서 진상조사단 결과에 불만을 드러냈다. 나아가 이번 파문을 “사법부의 이념·세대 간 갈등”으로 몰아 사법부 독립성 침해라는 본질을 물타기하려 들었다.
17일 한겨레·경향신문은 물론 동아·중앙일보까지 대법원 진상조사단의 발표를 1면에 보도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1면에 관련기사를 싣지 않았다. 조선일보가 진상조사단의 조사결과에 얼마나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는지는 관련 기사의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대법관 이메일 파문’ 뒤늦게 폭로한 경위는 조사 안해>(조선, 3면)
<법조계 반응 “정치성향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경향 바로잡아야”>(조선, 3면)
<법원이 이념과 세대로 찢겨선 국민이 신뢰 못해>(조선, 사설)
<‘대법관 이메일 파문’ 뒤늦게 폭로한 경위는 조사 안해>에서 조선일보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법원 인사이동이 끝나고, 신 대법관이 대법관으로 취임한 뒤에야 ‘폭로’가 이뤄지면서, 법원 안팎에선 ‘뭔가 배경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이 계속 제기됐다”고 엉뚱한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정치성향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경향 바로잡아야”>에서는 하창우 전 서울변협 회장의 “일부 판사들이 특정한 세력을 형성하고 이들이 조직적으로 반발하는 기류에 대해서도 적절한 조치를 취해서 사법부 조직을 튼튼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발언을 부각했다.
이어 ‘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낸 한 변호사’라는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해 “집단행동으로 이번 사태를 촉발시킨 일부 형사단독 판사들은 서울 한복판에서 불법시위를 벌인 사람들을 처벌하기 싫다는 의사를 드러내놓고 표시하지 않았느냐”, “법원 내부가 권위가 실종된 무정부 상태에 빠지면서 묵묵히 일하는 다수 법관이 마음에 상처를 입게 됐다”는 발언을 보도했다.
사설 <법원이 이념과 세대로 찢겨선 국민이 신뢰 못해>는 더욱 가관이다.
조선일보는 “관행적으로 인정돼오던 법원장의 사법행정권에도 ‘일선 판사들이 개입으로 느끼거나 판사들의 오해를 부르지 않아야 한다’는 선을 그어야 할 만큼 시대가 변했고 사법부도 변한 것”이라며 신 대법관의 재판 부당개입을 ‘관행적인 사법행정권’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이어 “국민은 이번 파동을 통해 대한민국 법원이 횡적으론 이념의 좌우로, 종적으론 세대 간 갈등으로 크게 찢겨 있고 사법부 안에 세계 어느 나라 사법부에도 없는 사조직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신영철 대법관 파문이 사법부 내부의 ‘이념갈등’, ‘세대갈등’인 것처럼 몰았다. 그러면서 “이런 법원과 판사들에게 대한민국 법률의 해석과 적용 그리고 국민의 권리 보호를 맡겨둬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걱정과 두려움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지난 정권 불과 몇 년 만에 대법관 15명과 헌법재판관 11명이 교체될만큼 정치권력은 사법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고 그 정치 권력과 성향을 같이하는 법원 내 사조직이 재야 법조단체와 손을 잡고 사법권력을 좌지우지했던 게 바로 얼마 전의 일”이라며 “이번 파동의 막전막후에서 사법권력 내부의 갈등 분위기를 느낀 사람이 적지 않다”고 주장했다. 신 대법관의 재판 개입을 문제제기한 판사들을 ‘과거 정권과 성향을 같이하는 사조직의 구성원’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어떤 사회든 ‘법’을 다루는 사법부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소장 판사들이 신 대법관의 시국사건 ‘몰아주기 배당’과 재판 개입행위에 반발한 이유가 ‘이념’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사법부 독립성 보장’은 헌법 정신이며, 헌법 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은 ‘보수-진보’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보수’를 자처하면서 헌법 정신을 짓밟는 것이야말로 ‘사이비 보수’임을 드러내는 꼴이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파문이 불거지기 시작한 직후부터 판사들에게 색깔공세를 펴면서 사건의 본질을 흐렸다. 그 이유가 ‘신영철 대법관’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조선일보는 자신들이 이명박 정권을 만들어냈다는 오만함에 빠져 사법부도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다는 비뚤어진 인식을 끊임없이 드러냈다. 즉 ‘이명박 정권의 비판세력들을 탄압하는 데 사법부가 들러리서야 한다’는 것이 조선일보의 기본 시각인 것이다. 조선일보의 눈에는 신 대법관의 재판 개입이 ‘진정’ 잘못된 일이 아니며, 그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이명박 정권이 사법부를 완전히 장악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의 상황만 본다면 조선일보의 구태의연한 색깔 공세는 국민들은 물론, 소장 판사들과 대법원 진상조사단에도 통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조차 조선일보처럼 대놓고 사법부 독립성 훼손을 정당화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가 끝까지 신 대법관을 감싸면서 판사들을 향해 색깔공세를 편다면 사법부 내의 양식있는 법조인들의 반발만 커질 뿐이다.
지금이라도 사법부 독립성을 흔드는 행태, ‘색깔’을 동원한 억지논리로 사법부를 찢어놓으려는 행태를 중단하는 것이 그나마 현명한 선택임을 명심하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