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기자 170명이 ‘방송독립을 위해 싸우는 KBS 젊은 기자들’을 결성하고 어제(3일) 여의도 KBS 본관 2층 민주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이병순 씨가 “18년 만에 KBS에 경찰력을 동원해 사장 해임안을 처리하고, 절차와 상식을 무시하며 폭거를 자행한 KBS 이사회가 사장으로 선출한 인물”이라며 “신임사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KBS에 경찰을 불러들이고 이사회를 파행으로 이끌면서 이병순 씨를 사장으로 임명제청한 유재천 이사장과 친여이사들에 대해서는 사퇴를 촉구했다. 조합원 투표로 가결된 ‘낙하산 사장 반대 총파업 결의’를 이행하지 않고 있는 KBS 노조 지도부를 향해서도 조합원의 총의를 수렴할 수 있는 ‘조합원 비상총회’ 개최를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자사 보도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MBC가 KBS보다 상대적으로 정확하게 이들의 주장을 전했다.
3일 KBS ‘9시뉴스’는 자사 기자들의 기자회견을 27번째 꼭지에서 단신 처리하는데 그쳤다.
“KBS 기자 50여명은 오늘 KBS 본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자 170명이 서명한 <KBS 사태를 바라보는 젊은 기자들의 결의>라는 제목의 결의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결의문을 통해 이병순 신임사장이 정치권에 몸을 담은 것도 아니고 도덕적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절차와 형식을 무시한 현 이사회의 사장공모에 응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사장 불인정과 이사장 사퇴 등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이 KBS의 관련 보도 내용 전부다.
기자들의 핵심 요구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이 짧은 보도에서 ‘이병순 신임사장이 정치권에 몸을 담은 것도 아니고 도덕적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다’라는 대목은 굳이 포함시켰다.
같은 날 MBC ‘뉴스데스크’도 KBS 기자들의 주장을 단신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뉴스데스크’는 “KBS 기자 170명은 오늘 기자회견을 갖고, ‘권력의 뜻에 따라 새 사장을 임명제청한 유재천 이사장과 이병순 신임 사장은 퇴진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기자들은 낙하산 사장 임명에 반대하기 위해 총파업을 결의했다가 철회한 KBS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조합원 총회를 열어 파업 여부를 논의하라고 촉구했습니다”라고 보도했다. KBS보다는 핵심을 잘 전달했다.
170명의 현직 기자들이 이명박 정권의 방송장악 시도에 맞서겠다고 나선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공영방송 정상화’ 운운하며 정연주 사장을 쫓아내고 ‘청부사장’을 앉혔지만 현장의 젊은 기자들은 그를 사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천명한 것이다.
그런데도 KBS 보도국은 이를 단신 처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핵심을 빠뜨리고 ‘이병순 씨가 도덕적 하자는 없다’는 등의 극히 지엽적인 대목을 부각시켰다.
우리는 이미 이병순 씨의 ‘취임’을 다룬 지난 8월 28일 KBS 보도를 접하며 앞으로 KBS의 보도 방향을 우려한 바 있다. 우리 뿐 아니라 KBS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어제 기자회견을 연 170명의 기자들도 “당연하게 누리고 있던 취재·제작의 자율성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밝혔다. 내부의 분위기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170명 기자들의 주장을 전한 KBS 보도는 우리의 우려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다시 한 번 KBS 보도국에 촉구한다. 정권과 ‘새 사장’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보도 방향을 정부 여당의 코드에 맞춰간다면 어렵사리 쌓아온 KBS의 위상은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며 국민들의 반발도 거셀 것이다. 국민들은 지금 KBS의 보도 내용과 방향을 어느 때보다 예의주시하고 있다.
아직은 국민들이 KBS 내부의 양심세력들을 보면서 KBS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러나 KBS 보도가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KBS는 ‘국영방송’ 취급을 받았던 과거 독재정권 시절의 굴욕을 다시 한번 겪게 될 것이다.
KBS 보도국이 ‘청부 사장’에 맞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할지언정, ‘KBS 보도가 정권의 눈치를 보지는 않는다’는 믿음을 시청자들에게 심어주기 바란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