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모니터_
5월 13일자 주요 일간지 일일 모니터 브리핑(2011.5.13)
등록 2013.09.24 23:12
조회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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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브리핑
5‧16쿠데타 앞두고, <조선><중앙> ‘정당화’‧‘미화’에 열올려
 
 
 
<조선><중앙>에겐 쿠데타가 ‘국경일’이라도 되나?
 
 
 
■ 5‧16쿠데타 앞두고, <조선><중앙> ‘정당화’‧‘미화’에 열올려
- ‘쿠데타’ 표현도 쓰지 않고, 정당성 부각에 열올려
 
5‧16쿠데타를 앞두고 일부 신문이 쿠데타를 ‘기념’, ‘미화’하는 기사들을 내보내고 있다. 
조선일보는 12일부터 <50년 맞은 5․16>이라는 제목으로 김종필 씨의 인터뷰 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중앙일보도 13일 김 씨의 인터뷰를 실었다. 김 씨가 쿠데타의 핵심 인물이었던 만큼 인터뷰의 내용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김 씨는 인터뷰에서 시종일관 쿠데타를 정당화하고 박정희를 미화했으며, 두 신문은 이를 적극 부각했다.
뿐만 아니라 두 신문은 ‘쿠데타’라는 표현 자체를 쓰지 않고 그저 ‘5‧16’이라고만 썼으며, 김 씨를 향해 “5‧16이 혁명이냐 쿠데타냐”는 하나마나한 질문을 던지며 쿠데타를 정당화하는 답변을 받아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박 소장이 ‘혁명 지도자’로 결정된 건 언제냐?”고 묻고, 중앙일보는 김 씨를 두고 ‘혁명가의 시선’ 운운함으로써, 5‧16을 ‘혁명’으로 정당화하고 쿠데타 세력을 ‘혁명가’로 정당화하고 싶은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혁명장교들, 거사 40일전까지 박정희가 지도자인 줄 몰라”>(조선, 1면/12일)
<박정희 소장이 그랬어 “서울은 네가 맡아라 외곽은 내가 손 써놨다”>(조선, 5면/12일)
<만삭 아내 배 만지며 “오늘 실패하면 총살된 얼굴 볼 거요…유복자 잘 키워주오”>(조선, 5면/12일)
<중정 요원 20명 이끌고 장도영 계엄사령관 잡으러 갔지 그가 말하더군 “왜 이제 왔어?”>(조선, 5면/13일)
<중정 요원이 24시간 감시하기에 소리 질렀지…“각하, 절 나세르로 의심합니까”>(조선, 5면/13일)
 
 
▲조선일보 1면기사(12일자)
 
 
12일 조선일보는 5․16쿠데타를 ‘거사’, ‘혁명’ 등으로 지칭하며 영웅담인 양 그 과정을 늘어놓은 김 씨의 인터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조선일보가 ‘5․16이 쿠데타입니까, 혁명입니까’라고 묻자, 김 씨는 “5․16을 폄하하기 위해 쿠데타라고 하는데 나는 그때도 그랬어요, 쿠데타건 레볼루션이건 우리나라를 근원적으로 변혁하고 발전시켰으니 아무뢘션이상관없다”고 답하는 등 기사는 그야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띄우기로 일관했다.
 
13일에도 조선일보는 쿠데타 세력이 송요찬 장군, 장도영 장군 등을 몰아낸 일을 영웅담처럼 전했다. 김 씨는 “3․15 부정선거로 국가가 흔들렸다, 4․19가 일어나고 학생들이 생명을 내걸었다”, “군인들도 적잖이 책임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을 내보내야 한다 해서 정군운동을 시작했다”는 등 쿠데타로 이어진 이른바 ‘정군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기사는 “무력충돌을 어떻게 피했나?”, “5‧16이 일생에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느냐”는 등의 질문을 통해 시종일관 쿠데타의 정당성을 부각하려 했다.
김 씨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 “(무력충돌을 피한 것은) 일이 되려고 했던 것”, “5․16이란 6․25전쟁에서 살아남은 젊은 장교들이 나라를 위해 두 번째로 죽음을 각오하고 덤볐던, 어떤 의미에서 숭고했던 순간”이라는 등의 주장을 폈다. 조선일보는 쿠데타를 “죽음을 각오한 숭고했던 순간”이라고 회고한 대목을 중간 제목으로 뽑아 부각하기도 했다.
한편, 기사는 김 씨가 “첫 인터뷰가 게재된 후 안부 전화를 수십 통 받았다면서 즐거워했다”거나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으로 3일 연속으로 게재한다”는 등 자신들의 5‧16 미화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중앙일보 1면기사
 
 
<“혁명은 숫자가 아니다 의지·민심으로 하는 것”>(중앙, 1면)
<“5·16 뒤 중정이 우리 집 감시했어…청와대 찾아 불평했지, 내가 나르세입니까”>(중앙, 4‧5면)
<백운학의 천기누설 “천하를 뒤집으려는데, 됩니다”>(중앙, 5면)
<[뉴스클립]41년 역사 새마을운동, 회원 200만 명 넘는 전국 최대 시민단체죠>(중앙, 경제18면)
 
중앙일보는 13일 1면과 4‧5면에 걸쳐 김종필 씨의 인터뷰를 싣고, 경제면에서는 새마을 운동을 “최대 시민단체”로 띄우는 기사를 실었다.
1면 <“혁명은 숫자가 아니다 의지·민심으로 하는 것”>을 통해 중앙일보는 “5․16은 한국사의 가장 드라마틱한 반전”, “건국의 사명을 완수한 이승만 시대의 바통이 박정희 시대로 넘어가는 장면”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박정희의 5․16세력은 산업화와 자주국방을 내걸고 한국 사회의 변혁을 주도”했다면서, 김종필 씨에 대해서는 “역사의 무게가 쌓여도 ‘혁명가의 시선’은 그때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고 그를 ‘혁명가’로 묘사했다.
기사는 5‧16이 혁명이냐 쿠데타냐는 질문을 해 김 씨로부터 “쿠데타는 같은 계층에 있는 사람이 변란을 일으키는 거고, 레볼루션은 민심을 기초로 아래에서 일어나 권력을 바꾸는 거야. 그렇게 따진다면 5․16은 레볼루션이오”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4면 기사에서는 “5․16은 서민층이 지지한 혁명”, “5․16은 4․19정신을 계승한 혁명”이라는 김 전 총리의 주장을 전했다. 이밖에도 기사에는 “박 대통령의 구국의 기초가 된 것은 유신”, “유신체제를 만들어서 비난을 하건 말건 밀어붙여서 70년대 중화학공업화 기반까지 만들어놔야겠다, 그러고서 유신을 했다”는 등의 주장을 펴면서 박정희를 ‘강직’, ‘청렴’, ‘유능’했다고 추켜세운 김 씨의 주장이 넘쳐났다. 김 전총리는 ‘거사의 1등공신’이 누구냐는 질문에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들 모두가 ‘거사의 1등공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한편 13일 한겨레신문도 ‘박정희’를 주요 의제로 다뤘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보수 및 진보 학계의 다양한 평가와 엇갈리는 시선들을 다뤘는데, 그다지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10면에는 <완공 앞둔 박정희기념관, 아픈 현대사 치유하려나>라는 제목을 달아, 박정희 기념관이 어렵사리 완공을 앞두고 있는 과정을 전함으로써 박정희 기념관에 일종의 ‘기대감’을 나타내는 듯한 인상마저 주었다.
또 <‘박근혜 정치’는 아버지의 그림자 어디쯤에…>라는 기사 옆에 박정희 사진과 나란히 있는 박근혜 의원의 모습을 크게 담은 사진기사를 실었는데, 자칫 ‘띄우기’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었다.

한겨레신문의 언급처럼 ‘박정희’라는 인물이 쿠데타와 장기 독재에도 여론조사를 하면 ‘지지율 1위’를 차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박정희 시대에 대한 복합적이고 정교한 평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직 주한미대사나 학계의 엇갈리는 평가는 ‘복합적이고 정교한 평가’라고 보기 어렵다. 수구보수세력들이 쿠데타마저 정당화하려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가운데, 한겨레신문이 ‘박정희 재평가’라는 의제를 부각하는 결과만 낳아서는 곤란하다.
 
 
<“박정희 1972년 핵개발 착수…1977년 포기했다”>(한겨레, 8면)
<보수, 산업화론 가다듬고…진보, 민주화론 확장하고>(한겨레, 9면)
<긴급조치 피해·영호남 불균형 ‘해결 미완성’>(한겨레, 9면)
<완공 앞둔 박정희기념관, 아픈 현대사 치유하려나>(한겨레, 10면)
<‘박근혜 정치’는 아버지의 그림자 어디쯤에…>(한겨레, 10면)
 
한겨레신문은 8면 <“박정희 1972년 핵개발 착수…1977년 포기했다”>를 통해 73년∼76년 미 중앙정보국 한국지부 총책임자로 있으면서 유신정권의 상황을 지켜본 도널드 그레그의 인터뷰를 실었다. 기사는 유신정권, 김대중 납치와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박정희, 박근혜에 대한 그레그의 개인적 생각과 당시 미국정부의 입장 등을 다루면서, 그가 박정희에 대해 “경제발전이라는 ‘빛’과 독재라는 ‘그림자’를 동시에 지닌 인물”로 평가했다고 전했다.
 
9면 <보수, 산업화론 가다듬고…진보, 민주화론 확장하고>에서는 유신정권에 대한 학계의 평가를 다뤘다. 기사는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민주주의를 억눌렀던 대통령이 여론조사에서는 늘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 정치인으로 꼽히는 것은 분명 모순”이라면서, “철권통치와 인권탄압, 압축적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복합적으로 맞물려 있는 박정희 시대는 항상 그만큼 복합적이고 정교한 평가를 요구”한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기사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엇갈리는 평가를 나란히 전하는 정도였다. 그러면서 최근 “독재가 아닌 민주주의가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민주적발전론’이 주목받고 있고, “일각에서는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자체에 대한 비판이 사라진 것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고 덧붙였다.
 
10면 <완공 앞둔 박정희기념관, 아픈 현대사 치유하려나>에서는 “숱한 우역곡절 끝에 ‘박정희 기념관’이 넉달 뒤면 완공될 예정”이라면서, “굴곡진 현대 정치사를 상징할 건축물이 될 박정희 기념관은 민주화 세력과 산업화 세력의 ‘정치적 화해’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기사는 박정희 기념관의 설립 과정을 상세히 전했다. 
 
같은 면 <‘박근혜 정치’는 아버지의 그림자 어디쯤에…>는 “(박정희가 박근혜에게)국민 지지율 1위로 올라설 수 있는 정치적 밑천을 상속해 줬지만 ‘독재자의 딸’, ‘유신공주’란 비판이 자라날 어두운 토양도 남겼다”, “아버지가 남긴 자산과 부채를 어떻게 정리하느냐에 따라 대선주자 박근혜의 운명은 갈린다”면서 박 의원의 딜레마를 다뤘다. <끝>
 

 
2011년 5월 13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