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_
‘경제단체의 규제완화 및 상속세 폐지 요구 관련 언론보도’에 대한 논평(2008.4.8)
‘부자정부’ 됐다고 막나가는 재벌,
방조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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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재벌들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고 있다.
4일 대한상공회의소 손경식 회장은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승수 총리 초청 전국상공회의소 회장단 간담회’에서 상속세를 폐지해 달라고 요청했다. 상속세가 ‘경영권 유지’를 어렵게 한다는 게 주요 근거였다. 대신 손 회장은 “상속받은 재산을 처분할 때 과세하는 자본이득세 즉 양도소득세를 과세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승수 총리는 “현재 상속세와 증여세를 어떻게 바꿀 지 논의하고 있는 중”이라며 “중소기업에는 매우 중요하므로 좀 더 검토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또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 대한상공회의소 등 경제 5단체는 지식경제부에 경제규제 개혁과제 267건을 제출했는데, 여기에 ‘직장내 성희롱 금지를 명시한 남녀고용평등법 12조 개정’, ‘육아휴직 중 해고 관련 벌칙 규정 완화’, ‘직장내 보육시설 설치 의무 완화’, ‘장애인·고령자 채용 의무 완화’ 등을 포함시켰다고 한다.
경제단체들의 이런 주장은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이윤만 추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이자, 불로소득에 대한 ‘납세의 의무’마저 외면한 채 ‘경영권의 안전한 되물림’을 보장해달라는 뻔뻔한 요구다.
그러나 대부분의 언론들은 쏟아지는 ‘재벌들의 투정’에 대해 무비판적이다.
지금까지 경제단체들의 ‘상속세 폐지’ 요구와 황당한 ‘규제 개혁’ 요구를 비판한 신문은 한겨레 정도다.
한겨레는 7일 사설 <성희롱 처벌을 완화해 달라는 경제5단체>에서 “재계의 도덕 수준을 의심케 하는 지나친 요구라고 할 수밖에 없다”며 “재계가 ‘비즈니스 프렌들리’에 편승해 자기 몫 챙기기와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다간 역풍을 만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겨레는 이 사설에서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의 상속세 폐지 요구에 대해서도 “경영권과 재산권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같은 날 중앙일보는 <규범과 규제를 혼동해선 안 된다>라는 사설을 실었지만 상속세 폐지 요구는 다루지 않았다. 다만 사설은 ‘보육시설 설치 의무 완화’ 요구 등에 대해 “이런 규제들은 인권이나 모성 보호, 저출산 방지 등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시대적 가치를 근거로 만들어진 사회적 안전장치”라며 “경제적으로 부담이 된다해서 풀 수 있는 일반적인 규제가 아니란 얘기”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런 지적을 하면서도 중앙일보는 “논란이 되고 있는 직장 내 보육시설 설치 의무나 장애인 채용 의무, 각종 산업안전 기준 등이 기업들에 경제적으로 부담이 된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고 전제를 달았다.
조선·동아일보는 4월 5일 ‘상속세 폐지’ 요구에 대해 짧은 기사를 싣고, 손 회장의 주장에 비중을 실어 전했다. 경향신문은 <상의 회장 “상속세 폐지” 주장 논란>에서 “시민단체는 재계의 이 같은 요구에 대해 ‘재산 상속’과 ‘경영권 승계’를 바라보는 시각 문제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며 시민단체의 비판을 덧붙이는 데 그쳤다.
방송의 경우 KBS가 4월 4일 <황당한 완화 요구>에서 재계의 ‘규제 완화’ 요구에 대해 “이중에는 분별없고 황당한 요구도 적지 않다”며 “직장 내 보육시설을 짓도록 한 의무 규정을 없애 달라는 요구도 들어 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근로자의 육아휴직 신청을 사업주가 ‘거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라고 보도했을 뿐이다.
손 회장도 말한 것처럼 재벌들의 ‘상속세 폐지’ 요구는 경영권 승계를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현행법에 따르면 상속 재산의 규모에 따라 10~50%의 세금을 내도록 돼 있는데, 과표가 30억 원이 넘어서야 50%의 세금을 내도록 되어 있다. 재벌들은 기업의 지분을 상속할 경우 상속세로 지분이 감소되어 경영권이 ‘위협’받게 된다고 주장하는데, 한마디로 기업의 ‘경영권 세습’을 당연하게 여기는 발상이다. 상속세 대신 자본이득세를 도입하자는 말도 결국 상속자가 기업 승계를 포기하고 매각하기 전에는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사회적 약자와 모성 보호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도 “돈만 벌면 된다”는 천박한 인식의 발로다. 게다가 ‘성희롱 처벌 완화’를 “규제개혁”이라니, 성희롱의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보호하는 것이 기업 활동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재벌들은 걸핏하면 해외의 “규제 완화” 사례들을 들고 나오지만, 그 전에 세계적인 거부(巨富)들이 어떻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는지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부시 정부의 상속세 폐지 방침을 무력화시킨 사람들은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워런 버핏 등 갑부 기업인들이었다. 워런 버핏은 ‘책임지는 부자’(Responsible Wealth)라는 단체까지 결성해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고 있다. 이런 부자들은 ‘경영권 세습’을 자본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로 여기며, 엄청난 재산의 사회 환원을 약속하기도 한다.
반면, 지금 우리 재벌들이 보이는 행태는 ‘도덕적 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 활동이 어렵다’며 삼성 특검을 연장하지 말아 달라, 상속세를 폐지해 달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을 지우지 말라 등등 온갖 요구를 쏟아낸다.
문제는 이런 요구들이 ‘프레스 프렌들리’를 내세운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힘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자내각’, ‘대한민국 1% 내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기업의 어려움’을 덜어준다며 규제 완화가 무조건 미덕인 양 ‘친재벌’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대불공단 전봇대 뽑기’ 같은 실효성 없는 전시행정을 규제완화의 상징처럼 부풀리기도 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언론은 재벌들의 요구를 편들거나 침묵하고, 기껏해야 ‘원론적인 비판’을 가끔 내놓는 정도다. ‘책임’을 ‘규제’라며 투정부리는 재벌, 재벌에 대한 규제를 포기하겠다는 정부, 정부와 재벌에 대한 감시를 사실상 포기한 언론을 보면 ‘선진화’는커녕 우리 경제의 체질이 더욱 악화되고 경제선진화는 요원할 것이라는 걱정만 앞선다. 재벌과 정부의 무분별한 규제 완화 움직임을 언론마저 방관하거나 방조했을 때 우리 사회가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기 바란다.
<끝>
2008년 4월 8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