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한나라당 '국가 정체성 논란' 관련 신문 사설에 대한 민언련 논평(2004.7.29)
그렇다면 '일부 언론'의 정체성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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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국가 정체성 위기'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박 대표는 지난 21일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정부가 국가 정체성을 이렇게 흔들면 야당이 전면전을 선포할 날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며 노무현 정부의 '정체성'을 문제삼고 나섰다. 박 대표는 '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관련 비전향장기수의 민주화 기여 판정 조사원의 전력 및 이들이 군 고위인사 조사한 것 서해 NLL 사건 관련 우리군의 '허위보고'를 문제 삼은 것 국가보안법 송두율 교수 재판' 등을 '국가정체성 위기'의 근거로 내세웠다.
박 대표의 이 발언은 곧 정치권의 논란으로 떠올랐고, 22일 박 대표는 또 다시 "대한민국 정통성을 훼손하고 나라를 부정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야당이 정부의 잘못을 견제하고 대안을 내놓는 것을 넘어 나라를 바로잡고 근간을 지키는 것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정체성 논쟁을 이어갔다.
그러자 26일 청와대는 '참여정부와 노무현 대통령의 정체성은 헌법 전문에 있다'며 "강제와 탄압, 인권유린을 통치수단으로 삼았던 개발독재시대의 국가주의적 정체성으로는 결코 선진 민주국가, 진정한 시장경제 시대로 갈 수 없다"고 반박하고 나서 이른바 '정체성 논란'이 한나라당과 청와대 사이의 갈등으로 확대되었다.
청와대가 '정체성 논란'에 대해 대응하고 나서자 28일 주요 신문들은 일제히 사설에서 이 문제를 다뤘으나, 논란의 원인과 해법을 찾는 데 있어 차이를 보였다.
특히, 조선일보는 다른 신문들과의 단순한 '시각차이'를 넘어 노 대통령 공격에 몰두한 나머지 판단력과 이성을 상실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억지스러운 주장으로 일관했다.
신문들의 보도태도는 사설 제목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실체없는 정체성 논란 계속할 건가>(한겨레), <저열한 정체성시비 끝내라>(경향), <지금 감정싸움 벌이고 있을 땐가>(중앙) 등 한겨레신문과 경향신문, 중앙일보는 정치권의 '정체성' 논란을 그치라고 주문했다.
물론 사설의 내용은 신문들마다 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이들 신문은 '정체성 논란을 중단해야한다'는 맥락에서 접근하고 있다.
반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그땐 '날개 단 듯했다'더니 지금은 '부끄럽다'니>(조선), <현 정권 정체성이 문제의 핵심이다>(동아)라며 오히려 정체성 논란을 부추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사설 내용은 더욱 황당하다.
솔직히 우리는 조선일보 사설이 '노 대통령을 공격하겠다'는 의도 외에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예의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의 헌법에 담긴 사상이 내 사상이라 달리 대답할 것이 없다", "이철, 유인태씨 같은 사람들이 유신에 항거해서 감옥살이 할 때 판사 한 번 해보려고 유신헌법으로 고시공부 한 것이 부끄럽다면 부끄러운 고백" 등 노 대통령의 '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비판의 내용과 방식이 상식을 벗어났다.
"대한민국의 헌법에 담긴 사상이 내 사상"이라는 노 대통령의 답변에 대해 조선일보는 "야당의 질문은 이런 일련의 사태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기본틀로 하고 있는 헌법정신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냐고 헌법을 보위할 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에게 물은 것"이라고 한나라당의 공세를 친절하게 '부연'하면서 '불성실하기 그지 없는 답변'이라고 주장했다.
도대체 조선일보가 기대하는 '성실한 답변'이란게 무엇인가? 조선일보는 한나라당이 이른바 '국가 정체성'을 위기로 빠뜨린다고 주장하는 의문사위원회의 결정이나 송두율 교수 재판, 군 '허위보고' 사건 등에 대해 노 대통령이 시시콜콜 입장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들 사건에 대해 조선일보가 얼마나 악의적인 왜곡보도를 저질렀는지는 새삼스럽게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야당의 정치 공세에 부화뇌동해 독립된 국가기구의 결정이나 사법부 판결을 놓고 대통령이 사사건건 입장을 밝히라는게 가당키나 한 일인지 되묻고 싶다. 조선일보는 자신들의 수구적 입장이 관철되지 못한 모든 일에 대해 대통령을 추궁할 생각인가?
또 조선일보는 당선자 시절 노 대통령이 한 TV프로그램에 나와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사법시험 합격을 거론하며 '새로운 날개를 달았다는 느낌'이라고 발언 한 것을 끄집어내 "도대체 어느 쪽 말이 대통령의 진심인가"라고 질타했다. '유신헌법으로 고시공부한 것이 부끄럽다'는 말과의 모순이라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1등 신문' 조선일보의 독해력이 이 정도밖에 안되나?
사법시험에 합격했을 당시의 '노무현'과 인권변호사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은 같은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사시 합격에 대한 개인적인 기쁨을 표현한 것과, 유신헌법의 문제점에 대한 '자각'을 놓고 '말바꾸기'라도 되는양 몰아붙이는 것은 참으로 유치한 일이다.
조선일보는 노 대통령의 '말'에 갇힌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기 바란다.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에 집착하다보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비판 능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이념의 차이를 떠나 최소한 신문으로서 '이성'을 되찾기 바란다.
조선일보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동아일보도 노 대통령에게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라'면서 한나라당의 공세를 거들고 나섰다. "'좌편향 정권'이라는 얘기가 자꾸 나오고, 불안해서 기업들은 투자를 꺼리고 일부 부유층은 재산을 해외로 빼돌린다는 말까지 나오니 정체성을 분명히 해서 국민을 안심시켜 달라는 것"이라며 '색깔론'까지 동원해 한나라당의 공세에 가세했다.
중앙일보는 한나라당과 청와대에 대해 양비론을 펴면서 청와대 비판에 무게를 실었다. 중앙은 "입만 열면 민생을 책임지겠다던 정치권은 오히려 상대의 과거와 색깔을 물고 늘어지며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며 "서로의 치부를 들추며 자신들의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고 양쪽을 모두 비난했다. 중앙은 지지율 하락에 대한 청와대 자체 분석결과를 거론하며 "무엇보다 대통령과 여당이 변하는 것을 국민이 보면 등을 돌렸던 민심이 바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향신문도 "국가의 정체를 밝히라는 황당한 요구를 하는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그에 맞서는 청와대가 뒤엉켜 연일 주고 받는 말솜씨들이 기가막히다"고 양쪽을 모두 비판했다. 그러나 경향은 중앙일보와 달리 "21세기의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이 이 나라를 사상검증해 보겠다고 나서는 그 무모함에 할 말이 없다"며 한나라당 공세의 본질이 부당한 '사상검증'이라는 점을 지적해 다소 차이를 보였다.
반면 한겨레신문은 '정체성 논란'에서 한나라당의 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그 부당성을 비판했다. 한겨레는 한나라당이 '정체성'의 문제로 거론한 사안들에 대해 "이는 대통령이 삼권 위에 군림하던 개발독재 시대에나 통하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박 대표의 발언에 대해 "수구냉전 세력의 결집과 궐기를 겨냥하고 있으며, 그 목적은 기득권 수호를 위해 역사 바로세우기를 무산시키자는 데 있다"고 비판했다. 한겨레는 "합리적 보수라면 국민의 자유와 인권의 가치를 지키고, 정당한 정부정책은 수용함으로써 사회 안정을 도와야 한다"며 "당파적 기득권을 위해 합리성을 버리고 색깔론으로 표변해 '전면전'을 벌인다면 이길 수도 없거니와 미래도 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그동안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이 각종 정책에서 보여준 태도가 '정체성 혼란'이라는 비판을 받을만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개혁노선'을 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라당과 수구신문은 정부와 여권이 개혁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틈을 타 아전인수격으로 '좌파냐 아니냐'는 식의 사상검증 공세를 벌이고 있다.
게다가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신문이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의 '정체성 공세'를 두고 보이는 태도는 한마디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동안 수구신문들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문제,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추진 등을 두고 '이 정권은 과거만 들춘다' 운운하며 '민생에 신경쓰라'고 비난해왔다. 그러나 정작 박 대표가 실체조차 불분명한 '국가정체성 위기'를 들고나와 연일 정치논란을 일으키자 한나라당의 '질문'에 답하라며 '정체성 논란'에 가세하고 나섰다. 왜 박 대표에게는 '민생에 신경쓰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조선일보를 비롯한 일부 신문들은 '민생' 운운하며 오히려 '정치논란'을 부추기는 자신들의 보도태도부터 반성해야 한다. 아울러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는 쓸데없는 '색깔론'으로 논란을 부추기지 말고 '상생의 정치'를 하라.
우리는 박 대표가 단지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에 대해 공세를 취하고 당내 비주류세력을 '달래기' 위해 '정체성 논란'을 들고 나온 것인지 묻고 싶다. 혹시 박 대표는 정책으로 대결할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박 대표가 '국가 정체성' 운운하기 전에 '건전한 보수'는 무엇이고 건전한 보수 정책은 무엇인지부터 제시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왜 돌연 태도를 바꾸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동안 박 대표는 대북문제와 국가보안법 폐지 등에 대해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보여왔다. 이런 박 대표가 쓸데없는 '국가정체성'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에서 조선일보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지난 7월 20일 조선일보는 사설 <한나라당은 보수야당의 혼을 찾아야>를 통해 "보수적 사람들은 지금의 한나라당이 개혁과 진보의 겉모습에 현혹된 채 보수정당의 정체성을 잃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자신과 확신을 상실한 채 표류하고 있다는 불만을 숨기지 않고 있다", "지금의 한나라당에 '정당의 혼' '야당의 혼' '보수정당의 혼'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절박한 과제는 없다"며 '수구적 태도'를 견지하라고 종용한 바 있다.
우리는 박 대표가 조선일보의 '프레임'에 갇혀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 이미지를 망가뜨리지 않기 바란다.
2004년 7월 29일
(사)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