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공공부문 비정규직 10만여명 정규직화' 관련 신문사설에 대한 논평
차라리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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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공공부분 비정규직 노동자 가운데 10만 여명을 정규직화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늦었지만 정부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일단 긍정적이다. 그러나 노동계는 이번 방침이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오히려 강화시킬 우려가 있으며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보다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신문들은 정부가 내놓은 초보적인 수준의 ‘공공부문 10만명 정규직화’ 방침에 대해서조차 왜곡된 논리로 딴죽걸기에 나섰다.
3월 26일 조선, 동아, 중앙은 일제히 정부 방침을 사설로 다루었는데, “정규직 노동자들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노동시장을 유연화해야 비정규직 문제가 풀린다”는 등의 왜곡된 주장을 펴는 한편, 정부가 앞장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만드는 것은 ‘춘투’를 앞둔 노동계를 자극해 기업을 압박하고 경제를 거덜내는 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조선일보는 사설 <정부의 비정규직 해법은 속임수다>에서 “노동시장의 경직성이 비정규직을 양산”했다며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해고와 고용이 자유롭도록 하는 것”이 비정규직 문제를 푸는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발령내는 식의 방법을 취한다면 “기업은 국제경쟁에서 도태되고, 공장은 문을 닫고, 노동자는 정규직 비정규직 할 것 없이 거리에 나가앉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폈다.
나아가 조선일보는 정부 방침을 두고, “이런 식의 정책이 춘투를 앞둔 노동계를 자극해 기업들도 같은 조치를 해야 한다는 압력에 시달리게 만들 것”, “정부는 대책을 마련할 능력이 없으면 대책을 내놓지 않는 게 낫지, 이런 속임수로 기업까지 못살게 굴어서는 안된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중앙일보도 사설 <‘10만 정규직화’…이러니 경제가 죽는다>에서 “노동시장이 유연하면 기업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그로 인해 경제가 일어나면 고용이 증대돼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큰 문제가 안된다”며 노동시장 유연화를 주장했다.
또 “고임금의 대기업 노조는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고, 정규직은 해고도 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비정규직을 모두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기업의 경쟁력이 어디서 생기냐”며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 노동시장 경직성 때문에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운 것처럼 주장하기도 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중앙은 공공부문의 비정규직이 늘어난 결과 “생산성이 과거에 비해 나아졌으며 예산도 절감할 수 있었다”는 등 공공부문의 특성을 무시한 ‘생산성 증대’를 근거로 비정규직을 합리화했다.
동아일보도 사설 <10만명 정규직화, 감당할 수 있나>에서 “외국기업들이 지나친 고용경직성 때문에 한국 투자를 기피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정규직은 기득권을 누리면서 비정규직 처우 개선을 힘으로 밀어붙이면 산업공동화 속도가 빨라지고 안정된 일자리만 줄어들 뿐”이라며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정규직의 ‘기득권’ 포기가 문제 해결의 실마리인 듯 몰아갔다.
또 공공부문의 비효율성을 줄이는 것이 비정규직 보호 못지않게 중요하다며 “공공부문의 몸집을 불리고자 할 때는 최소한 그에 상응하는 생산성 향상 대책도 함께 내놓으라”고 주문했다. 공공부문에서 비정규직 증가가 효율성 또는 생산성을 향상시켰다는 중앙일보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주장이다.
나아가 동아일보는 “비정규직 축소와 처우 개선이 올해 노사협상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이번 대책은 노동계의 입지를 일방적으로 강화할 소지가 많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결국 표현만 다른 이들 수구신문의 주장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비정규직이 증가한 것은 우리 노동시장이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을 더욱 유연화해야 하며, 정규직 노동자들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둘째, 노동시장을 유연화해야 기업 경쟁력이 살아나고, 기업 경쟁력이 살아나면 일자리가 늘어나서 정규직, 비정규직은 별 문제가 안된다.
셋째, 공공부문의 비정규직 증가는 효율성을 높여주었다. 이를 다시 정규직화하면 비효율성을 증가시킬 것이다.
넷째, 정부가 앞장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하는 것은 기업을 압박하고 경제를 망치게 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비정규직 문제의 원인과 해법을 심각하게 호도하는 것으로, 일방적인 재계 편들기에 다름 아니다.
‘노동시장의 경직성 때문에 비정규직이 늘어났다’는 수구 신문들의 주장과 달리, 우리 노동시장의 유연성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을만한 수준이다. 2003년 미국의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동시장 유연성은 OECD 국가 가운데 3위로 나타났다. 56.6%에 이르는 비정규직 비율은 노동시장의 경직성 때문이 아니라, 외환위기의 와중에 신자유주의 노동정책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인데 그 원인이 있다.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것이 기업을 살리고 일자리를 늘여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주장도 근거가 없다. 설령 노동시장을 유연화함으로써 기업이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게 되고, 고용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곧바로 비정규직 차별과 같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수구신문들이 기업이 잘되면 고용이 증대돼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큰 문제가 안된다”거나 반대로 기업이 어려워지면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거리로 나앉게 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을 펴면서 ‘노동시장 유연화=기업 경쟁력 강화=비정규직 문제 해결’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기존의 정규직마저 비정규직으로 내몰아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하향평준화’할 것이라는 게 노동계 전반의 우려다.
한편, 공공부문의 비정규직화가 예산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였다는 주장은 이들 신문이 공공부문의 특성에 무지하거나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공공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은 ‘비용절감’과 같은 경제적 ‘효율성’만으로 평가되어서는 곤란하다. 뉴욕의 정전 사태나 영국의 철도 사고 등은 공공부문에서 경제적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우리도 대구 지하철 참사를 통해 경제적 효율성을 내세운 ‘1인 승무제’가 ‘안전운전’이라는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요인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런데도 수구신문들은 비정규직의 증가로 ‘비용을 줄일수는 있다’는 점만 부각할 뿐 그로 인해 공공 서비스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정부가 앞장서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함으로써 기업에 부담을 주고 경제를 망칠 것이라는 주장도 섣부른 예단이다. 오히려 비정규직의 양산은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을 부추기고 노동자들의 소비 능력을 현격하게 위축시킴으로써 내수시장의 침체를 가져와 경제가 더욱 어려워 질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입만 열면 소비가 위축됐다고 떠드는 수구신문들은 서구의 선진국들이 비정규직에 대해서도 정규직과 동일한 수준의 임금을 보전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안이다. 이를 해결하는 데 정부가 나서는 것은 당연하며, 정부의 정책이 실효성을 가질 수 있도록 사회적 논의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다. 그러나 수구신문들은 정부가 내놓은 초보적인 대책에 대해서조차 딴죽을 걸고 있다. 우리는 수구언론의 이같은 딴죽걸기가 특정한 의도를 가진 ‘재계 편들기’가 아닌지 묻고 싶다. 즉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해법이 노동계에 확산되는 것을 막고, 더 나아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인 논의가 진전되는 것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말로는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떠들면서 재계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수구신문들은 차라리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침묵하라. 그것이 우리 사회가 비정규직 문제를 합리적으로 논의하고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004년 3월 27일
(사)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