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불법 대선자금 관련 노 대통령 발언을 다룬 주요 신문 보도에 대한 민언련 논평(2003.12.15)
더 큰 문제는 ‘10분의 1 발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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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노무현 대통령이 4당 대표와의 회동에서 불법 대선자금에 관한 철저한 수사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불법 대선 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이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를 은퇴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15일 주요 일간지들은 일제히 노 대통령의 발언을 '폭탄선언'으로 규정하고, 그 의도와 파장을 다뤘다. 신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노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이들 신문이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한 근거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노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가볍게 보고, 정치적 승부수로 이용한다는 것, 둘째, 검찰 수사에 사실상 '가이드 라인'을 제공함으로써 검찰 수사의 공정성이 훼손될 우려가 크다는 것, 셋째, 불법 대선자금에 대한 '면죄부' 기준을 '한나라당의 10분의 1'로 자의적으로 설정, 제시했다는 것 등이다.
발언의 의도나 배경을 따지기 전에, 노 대통령이 '직을 건다'거나 '정계 은퇴 용의가 있다'는 식의 표현까지 쓴 것은 분명 비판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주요 신문들이 대통령의 발언을 다루는 방식 또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일부 신문들이 '대통령직'에 대한 노 대통령의 발언을 거두절미해 왜곡하거나, 불법 대선자금 의 문제를 '대통령의 발언과 그를 둘러싼 정쟁'으로 협소하게 다룸으로써 큰 틀의 정치개혁을 희석시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은퇴 용의"를 "은퇴"로 왜곡
청와대가 공식적으로 정리, 발표한 대통령의 이른바 '10분의 1' 발언은 불법자금의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이 넘으면 "대통령직을 걸고 정계를 은퇴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요 신문들의 1면 기사 제목을 살펴보면 <"불법자금 한나라의 10% 넘으면 대통령 물러나겠다">(조선1면), <불법자금 한나라의 10% 넘으면 盧는 "정계은퇴">(경향1면), <"불법자금 한나라 1/10 넘으면 은퇴">(한겨레1면), <"불법자금 한나라 10분의 1넘으면 대통령직 걸겠다">(중앙1면), <"불법자금 한나라의 10분의 1넘으면 정계 은퇴할 용의있다">(동아1면) 등이다.
조선과 경향, 한겨레는 노 대통령이 '사임' 또는 '정계은퇴'를 단언한 듯이 제목을 뽑았다. 정계 은퇴할 "용의가 있다"는 표현을 1면 기사의 제목으로 그대로 쓴 신문은 동아일보 뿐이다. 기사 제목이 독자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다소 선정적이고 단정적인 표현을 쓴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막중한 대통령의 직'을 강조하는 신문 스스로가 '용의가 있다'는 부분을 빼버린 점은 이율배반적이기까지 하다. 게다가 관련 기사 및 사설의 제목과 내용 등에서는 거의 모든 신문이 '사임' 또는 '정계은퇴'를 기정사실로 전제하는가 하면 '10분의 1이 넘으면 사임할 것'을 종용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0분의 1' 사임 파문>(경향4면), <노대통령 "불법자금 한나라의 10%넘으면 정계은퇴>(조선6면), <노 "불법자금 한나라 10분의 1넘으면 사퇴">(동아8면), <"한나라당의 10분의 1넘으면 은퇴">(중앙 사설), <노대통령 '조건부 정계은퇴' 발언 배경>(한겨레 4면) 등의 표현은 모두 노 대통령이 '사임', '정계은퇴'를 단언한 듯 쓰고 있다. 특히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노 캠프의 불법자금이 대통령이 제시한 기준을 넘었다면 약속대로 대통령직을 물러나야 한다"고 쐐기를 박기도 했다.
언론이 세 번 왜곡
더욱 심각한 것은 신문들이 노 대통령의 발언을 단정적인 형태로 바꾸면서 맥락이 다른 과거의 발언들을 묶어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경향, 조선, 동아, 중앙은 모두 노 대통령이 대통령직 사임과 관련한 발언을 세 차례나 했다면서 이를 요약하고 비판했다.
즉 이들 신문은 "대통령직 못해먹겠다"(5월) "재신임을 받겠다"(10월)와 이번 '10분의 1발언'을 '하야 승부수'(경향, 동아), '국민 협박'(중앙) 등으로 규정했다. 조선일보도 "대통령직 '그만 두겠다'가 벌써 몇 번째인가"라며 노 대통령의 발언을 모두 '사임 표명'으로 왜곡했다.
중앙의 경우는 "대통령의 말이 양치기 소년의 말처럼 신뢰를 잃어버린다면 그 자신의 불행을 떠나 국가와 국민에게 끼치는 해악이 이만저만 아니다"라며 대통령이 거짓말이라도 한 것처럼 호도하기도 했다.
이들은 세 차례의 대통령 '발언'을 왜곡했을 뿐 아니라 그 맥락이 각각 다른 발언들을 '사임 표명'으로 엮어 비난했다. 예를 들어 이른바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발언은 사회 각 영역에서 대립하는 요구들이 쏟아지는 상황의 어려움을 빗대 "이러다가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표현한 것이다. 또 재신임 발언은 발언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측근 비리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인가에 대한 방법상의 문제였다.
표현의 부적절성이나 정국 해법의 방식을 각각 비판할 수는 있겠으나, 이를 '사임 발언'으로 뭉뚱그려 '걸핏하면 대통령 직을 악용한다'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은 명백한 왜곡이며 '대통령의 말'이라는 대중적 관심사를 지극히 선정주의적으로 악용하는 행태이다.
일부 신문들이 노 대통령의 이번 발언이 나온 맥락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노 대통령의 발언은 4당 대표와의 회동에서 '불법 대선자금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나왔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발언이 어떤 과정에서 나왔는지를 언급한 신문은 경향, 중앙, 한겨레뿐이며, 조선과 동아는 이를 빼버림으로써 대통령의 발언을 더욱 '돌출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다.
즉 경향, 중앙, 한겨레는 노 대통령의 발언이 4당 대표와의 회동 중 '노 캠프의 불법 대선자금 규모'와 관련한 한나라당의 '아니면 말고식' 폭로에 대해 명확한 근거를 갖고 문제제기 할 것을 요구하면서 나온 것임을 설명한 반면, 조선과 동아는 이를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번엔 '수사지침'으로 왜곡
결국, 이들 신문은 대통령의 발언을 '사임 협박'으로 몰아, 이것이 검찰 수사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로 나아갔고, 일부 신문은 이를 기정사실화 하기 위해 교묘한 왜곡을 동원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조선일보는 6면에 <"대통령 발언에 수사 부담">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어, 검찰이 대통령의 '사임' 발언 때문에 여권 수사에 부담을 느끼는 것처럼 표현했다. 그러나 정작 기사 내용을 보면 '검찰'이 부담을 느끼면서도 "원칙에 따른 수사를 강조했다"거나 대검 '간부'들이 "개의치 않고 수사에 전념하겠다", "수사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낀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이다.
또 동아일보는 8면에 <"수사지침 아닌가" 검찰 부담>이라는 기사를 실었으나, 분명한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검찰이 "수사 과정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거나 '한 관계자'의 말을 빌어 "대통령이 (불법 대선자금 규모에 대해) 선을 그으면 정치 보복을 우려하는 기업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는 일방적인 주장을 실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들 신문이 대통령의 발언을 단정적으로 규정하거나 왜곡하고, 그것이 미칠 정치권의 파장에 초점을 맞추면서 불법 대선자금 문제의 본질을 흐려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거야(巨野)'와 언론이 한목소리로 주장한 "10분의 1이 안되면 괜찮다는 것이냐"는 논리는 불법 대선자금을 놓고 벌이는 말장난 수준의 정치 공방에 다름없다.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이 안되면 괜찮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특검 수용 등을 포함해 불법 대선자금에 대해 철저하게 수사해야 한다는 뜻을 비쳤다.
"10분의 1이 넘으면 정계은퇴 용의가 있다"는 말은 "그 이하는 괜찮다"는 말과 명백히 다른 것이며, 노 캠프 측의 불법 자금 규모가 '10분의 1'이 못되는 경우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철저히 수사한 뒤 '불법 대선자금'을 근절하고 정치 개혁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불법 대선자금 문제를 '10분의 1과 대통령직 사임'으로 단순화시켜 몰고가는 언론의 보도야 말로 '불법 대선자금 근절=정치개혁'이라는 의제를 '대통령의 부적절한 언행 문제' 혹은 '편파수사'의 문제로 왜곡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일부 수구 신문들은 '대통령의 말'을 기사 가치나 발언의 진위와 관계없이 왜곡해 '정부 흔들기'에 악용하고, 상업주의적인 동기로 확대 재생산 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번 노 대통령의 '10분의 1 발언'은 분명 비판의 소지가 있다. 우리도 노 대통령이 여러 객관적인 정황들을 고려해 보다 신중한 '어법'을 구사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언론들이 표현의 문제를 놓고 사실을 왜곡하거나 호도하는 것은 더 문제다. 각 신문들의 '희망 사항'이 왜곡보도에 담겨있다면 이는 더욱 더 심각한 문제이다.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을 떠나 언론의 기본을 지켜줄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한다.
2003년 12월 15일
(사)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