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문_
경제지들의 시장주의 강변 ‘삼위일체’
등록 2017.04.18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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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지의 ‘시장주의 대 반 시장주의’, ‘자유경제 대 반 자유경제’라는 대선 프레임 
선거 프레임 대결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번 대선 명칭을 ‘장미 대선’으로, 아니면 ‘촛불 대선’으로 각각 따로 부르는 것부터가 프레임 대결의 하나다. 명칭을 둘러싼 논란이야 상대적으로 사소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프레임이 형성되고 있다. 


먼저 기득권 보수 언론들은 이번 대선의 이슈를 ‘적폐청산이냐 국민통합이냐’ 또는 ‘분열이나 화합이냐’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몰고 있다. 이 프레임은 이미 매우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들 보수 기득권 언론은 “이제는 적폐청산보다 국민화합에 나설 때”라고 거듭 주장한다. 먼저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간의 대결을 ‘부패기득권세력과의 대결’ 대 ‘편 가르기 정치를 끝내겠다’는 진영 간의 대결로 규정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사설/“기득권과 대결”이란 문, “편 가르기 끝낸다”는 안>(4/11 https://goo.gl/VTnLJV)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조선일보 사설은 “이번 대선이 ‘적폐 청산’ 대 ‘편 가르기 청산’으로 선명해졌다”며 적폐 청산을 편 가르기와 분열로 규정하고는 “이 중에서 무엇이 나라에 필요하고 도움이 될지를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경제지들은 또 다른 강력한 프레임을 내세우고 있다. ‘시장주의 대 반 시장주의’, ‘자유경제 대 반 자유경제’의 프레임이다. 평상시의 보도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선거 국면에서 경제지들은 이 프레임으로 후보 선택의 기준을 제시하고 후보들을 견인하려 한다. 이들에게 시장주의는 경제학이 아니라 ‘종교적 교의’에 가깝다. 그 교의를 뒷받침하기 위해 시장주의와 자유경제가 위협받고 있다고 현실을 진단한다. 그 같은 진단으로부터 후보들의 정책과 공약에 대한 당부(當否)의 판정을 내린다. 자신들의 기준에 어긋나면 ‘이단’으로 규정한다. 이렇게 해서 자유시장주의 전파의 목적과 인식과 수단의 ‘삼위일체’가 완성된다.


한국경제의 <다산칼럼/몽펠르랭학회의 자유주의에 길을 묻다>(4/12 민경국 강원대 명예교수 https://goo.gl/0GLt7w)라는 칼럼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칼럼은 “우리사회에서 경제는 규제의 대상일 뿐”이며 “법치에 어긋나는 차별법이 쌓이고 정실주의 부정부패 사회갈등만 만연한다”고 진단한다. 경제자유주의가 위협받고 있는 지금 자유주의가 부활한 큰 계기가 됐던 1947년 하이에크 주도의 몽펠르랭학회(MPS) 창립이 4월이었음을 상기시킨다.

 

이 글의 필자는 한국사회가 참담한 현실에 놓여 있다고 개탄한다. “요즘 경제적 자유를 말하는 사람은 이른바 적폐 대상이다. 좌파의 눈치를 보면서 자유를 말해야 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그러니 MPS의 자유주의에 길을 묻지 않을 수 없다면서 “경제적 자유야말로 번영의 열쇠요 언론·사상·종교 등 시민적 자유의 보루이고 민주 발전의 선결조건으로서 여타의 자유보다 높은 가치다. 법치는 경제적 자유의 수호자며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정부의 권력행사는 제한돼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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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를 상충하는 것으로 규정한 한국경제 칼럼(4/12)

 

그는 대담하게도 “경제적 자유보다 민주주의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게 좌파다”라며 민주주의와 경제적 자유를 상충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규제가 많을수록 기업들은 정부 정책을 비판하기 어렵다. 세무사찰, 인허가 배제 등 정부의 불리한 처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라는 주장은 엉뚱하게도 이것이 ‘언론자유가 불안정한 이유’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매우 창의적인 발상이다. 


또 우리 사회의 법치 인식이 취약하다면서 “강자로 분류되는 대기업에 대해서는 규제일변도이고 약자에 속하는 중소상공인과 농수산업은 보호, 시혜 일변도의 입법이 쏟아진다”고 진단하고는 누진세, 조세감면, 특별소비세, 복지, 재분배 등을 ‘법치에 어긋나는 차별법’이라고 하는 걸 넘어서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특별입법된 ‘민주화보상법’까지 소급입법의 반 법치라고 단죄하기까지 한다.


 이들에게는 정부와 시장이 상호보완적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은 거의 없다. 정부로 대표되는 공공의 적정한 기능과 역할이 작동해야 공정한 ‘시장’이 형성된다는 것에 대한 이해나 최소한 이해해보려는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런 태도가 대기업개혁 등 경제정책에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특정 후보에 대한 거부감으로 나타난다. 

 

 

2. 문재인의 ‘큰 정부’에 시비 삼고 싶은 경제지들
한국경제의 <‘큰 정부’ 내세운 문재인, 오바마처럼 “재정 확대”>(4/12 서정환 기자 https://goo.gl/SNPaXy)라는 기사는 문 후보가 12일 발표한 경제정책 기본 방향, ‘제이(J)노믹스’ 구상에 대한 평가를 하면서 ‘큰 정부’로 제목을 뽑았다. 보육 교육 의료 요양 등 복지 분야에 재정 지출을 과감하게 확대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라면서 정부 역할을 강조한 ‘큰 정부’를 내세웠다고 평가한다.


‘큰 정부’라는 용어는 그 자체로 시비를 삼을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시민이 ‘큰 정부’라고 말하면, 공공부문의 방만한 경영 등 우리 사회에서 공공과 정부의 확장부터 떠올리며 거부감을 갖고 있다. 이런 부정적 인식에는 분명 타당한 측면도 있지만, 사실상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평가보다는 왜곡된 정보 제공 등에 의한 과도한 비판인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의 경제정책을 전하는 기사 제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민간의 자율을 해치는 비대정부를 만들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할 수 있는 부정적인 평가이며 편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는 프레임은 프레임으로서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의 기능 중에는 지금보다 더 크게 할 것이 있고 더 줄일 것이 있다. 정부 기능의 어떤 부분을 확대할 것인지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는 얘기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에서 미국 보수와 진보의 프레임 전략을 탁월하게 분석한 인지언어학자 레이코프 교수의 “보수 세력은 정말로 작은 정부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군대나 FBI, 재무부나 상무부, 법원을 없애길 원치 않는다. 그런 것이야말로 그들이 선호하는 큰 정부다. 그들이 정말로 없애고자 하는 것은 사회보장 프로그램, 즉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서민들의 자조를 돕는 프로그램이다”라는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문재인에 대한 이 같은 ‘비 시장주의자’ 진단은 문재인의 대척점, 보수 세력의 희망으로 안철수를 내세우려는 기득권언론의 의도와 겹친다. 서울경제 <문재인·안철수 공약 대해부/문 “관주도” 안 “민주도”…일자리정책 선명성 경쟁’>(4/10 민병권 기자 https://goo.gl/HqOWtn)이라는 기사에서 안 후보는 ‘규제 간소화’ ‘반기업 정서의 문제점 지적’ 등 시장중심의 정책 기조를 내세우는 후보로 평가된다.


한국경제 <사설/‘문재인의 J노믹스가 유의해야 할 세 가지’>(4/12 https://goo.gl/WWnxjx)도 문재인 경제정책의 ‘비 시장주의’에 대한 경계심을 숨기지 않는다. 사설은 문 후보의 ‘사람 중심 경제’가 사람 대 기업, 중소기업 대 대기업의 대립관계로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을 갖게 한다면서 “사람에 대한 투자라지만 주로 복지와 공공일자리 등에 집중돼 있”다고 우려한다. 또한 이에 대해서 “‘일자리는 기업이 만든다’는 당연한 경제원칙을 부인하는 것이라면 곤란하다”고 경고음을 울린다. 대기업의 ‘갑질’은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면서도 ‘밀어내기, 후려치기, 몰아주기…’ 등의 표현을 들어 “시장의 한 단면만 보고 대·중소기업 관계를 선악 구도로 치부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사설은 ‘큰 정부’를 지향하면서 민간의 자율과 창의를 기대할 수는 없다면서 그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도 요구하는 게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훈수를 둔 것이다. 

 

 

3. 자율과 창의에 대한 이중잣대
그런데 이렇게 자율과 창의를 내세운 신문이 그 전날의 같은 사설에서는 그와 상반된 인식을 보여준다.

 

한국경제의 <사설/‘통제불능 교육자치 이대로 둘 건가>(4/11 https://goo.gl/Hv4Ax5)는 교육부가 전교조 전임 활동을 이유로 결근해온 교사 16명에 대한 징계요구 공문을 각 시·도 교육청에 보낸 것을 놓고 ‘전교조는 노동조합이 아니므로 전임자 허가는 물론이고, 연가 허용도 불법’이라는 교육부의 확고한 판단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고는 “중앙정부의 정책이 지방 교육청이라는 거대한 벽에 번번이 가로막히는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그러고는 “과도한 교육자치가 근본 문제다. 교육감 직선제라는 과잉 정치가 교육행정의 기형화를 부채질했다”고 개탄한다. ‘자율을 감당 못 하는 교육자치’라고 간단히 단정해버리고는 교육감 직선제도 당연히 재검토해야 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교육부가 교육의 창의와 자율을 해치고 있다는 비판이 많고 그래서 교육부 폐지를 주장하는 후보까지 나오는 등 교육행정에 대한 전면적인 개편 여론이 높은 현실에서, 자율과 창의에 대한 이중 잣대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공교롭게도 이 신문의 이날자 인터넷판에는 위의 사설 바로 밑에 ‘학생들의 대학 경영 간섭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설문조사가 실려 있다. 학생들의 대학경영 참여에 대해 ‘간섭’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창의와 자율을 얘기하면서도 대학의 창의와 자율 신장을 위한 한 방편으로 논의되고 있는-세계의 많은 대학들에서 이미 일반화돼 있는-학생의 학교 운영 참여에 대해 부당한 ‘간섭’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4. 기업의 자유는 무제한 보장돼야? 
매일경제 <매경데스크/국가의 부는 어디서 나오는가(4/9 김명수 증권부장 https://goo.gl/p58N4k)는 시장주의의 한 극단적 주장을 보여준다. ‘국부의 원천은 기업이며 그런 점에서 기업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서두를 뗀 이 칼럼은 “그러나 우리 정치인들은 기업에 투자와 고용 창출을 요구하면서도 선거철만 되면 기업을 제물로 삼는다”고 말한다. “특히 경제민주화라는 헌법적 가치를 끌어다가 기업활동을 제한하는 공약을 내세운다. 일탈 행위를 한 일부 대주주 때문에 형성된 반기업정서를 확대 재생산하고 이를 활용해 표를 얻으려는 전략이다. 심지어 일부 대주주의 일탈을 기업의 일탈로 해석하고 한국의 모든 기업을 국민의 적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필자의 말처럼 기업은 국부 창출의 원천-그러나 유일한 원천은 아니다-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기업활동에 무제한의 자유를 줘야 한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것인가. 글을 읽다보면 대담하게도 그런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필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무리한 표현을 불사한다. ‘경제민주화’라는 헌법적 가치에 입각해 기업활동에 적정한 규제를 강구하는 것을 ‘기업활동 제한’으로 표현하고, 일탈 행위를 한 일부 대주주에 대한 반감을 ‘반기업 정서’라고 규정하고는 정치권에서 이를 확대 재생산하고 표를 얻으려 한다고 꾸짖는다. 


급기야 “심지어 일부 대주주의 일탈을 기업의 일탈로 해석하고 한국의 모든 기업을 국민의 적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하는데, 후보마다 기업단체들을 열심히 찾아가 그들의 얘기를 경청하는 장면들을 방송 화면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대체 어떤 후보가 ‘한국의 모든 기업’을 ‘국민의 적’으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건가. 


이 칼럼은 ‘글로벌 톱10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우리 경제 내에 기업가정신과 경제적 자유가 충만해야 한다’면서 ‘그 밑바탕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이 있어야 한다’고 제시한다.


묻고 싶다. 기업가정신으로 무장한 대기업 경영자(특히 재벌 총수)들의 헌신적 노력을 우리 사회가 제대로 알아주지 않고 있다는 것인가. 기업에 대한 신뢰를 해치는 것에 대해 누구보다 우선적으로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건 과연 누구인지 묻고 싶다.  


그러나 그런 물음은 반향 없는 메아리가 될 뿐일 듯하다. 일부 대주주들이 편법 승계를 하다 국민의 반감을 키운 것도 ‘국제 기준과 동떨어진 세제 탓’을 할 뿐인 인식이라면 (대)기업에 대한 어떤 비판도 귀에 들어오기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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