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민중총궐기를 맞이한 박근혜 대통령의 심정 빙의 글  

‘격세지감’·‘음수사원’이 떠오르며 자괴감에 울컥
등록 2016.11.16 16:36
조회 268

지난 11월 12일 저녁, 어디에 계셨습니까? 뒷산에 붉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고 있으시지 않으셨는지요? 필녀인 전 외롭게 지냈습니다. 개인사들을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은 터라 괜히 밖에 나갔다가 화를 당할지 몰라 지인을 불러볼까 생각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습니다. 휴대폰에 저장해 놓은 전화번호 10개가 모두 불통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밖에 나간다면 어떤 옷이 좋을까 생각했지만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글을 써 보려 해도 빨간펜이 없어 그만뒀습니다. 거울을 잠깐 보다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겨우겨우 점심을 먹었습니다. 여건이 좋지 않을수록 새로운 비전과 창의적인 발상, 그리고 도전 정신으로 앞으로 과감하게 달려 나가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지만 요즘 들어 정반대의 결과를 낳게 되는 일이 많아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깊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잡념을 버리고 들숨과 날숨에 집중했습니다. 머리가 한결 깨끗해졌습니다.

 

요즘 미디어를 잘 보지 않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 ‘잭 팟 터트린 외교’, ‘유창한 외국어’, ‘레이저 눈빛’, ‘링거 투혼’, ‘선거의 여왕’ 등 온갖 좋은 말을 해주던 기자들이 더 이상 장점을 보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엔 예능 프로그램도 문제가 많이 있어 보여 토요일 저녁 음식 소개 프로그램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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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각 서울 도심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 8시 뉴스는 평소보다 30분 일찍 시작해 2시간 동안 특집 뉴스로 촛불집회에 참가한 민심을 전해 드립니다. 먼저 광화문 광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날 SBS 뉴스는 30분 일찍 시작하더군요. <100만 명 모였다. 이 시각 광화문>이라는 리포트를 시작으로 <청와대 1km 앞까지 행진>, <“대통령 하야” 한목소리>, <‘혼참러’, 수능생, 연인들도 나왔다>, <종교계도 “퇴진하라” 한목소리> 등 온통 촛불 소식이었습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2시간 15분을 편성했다고 합니다. 뉴스 공백이 있을 것 같아 MBC로 채널을 돌렸습니다. 첫 뉴스의 제목은 <100만 명 모였다 ... 이 시각 광화문>이었습니다. 이어진 앵커의 멘트를 듣자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분노한 민심이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습니다. 주최 측 추산 100만 명, 지난 87년 6월 항쟁 때와 맞먹는 숫자입니다.” 

 

뉴스는 8꼭지에 걸쳐 촛불집회 관련 내용을 전했습니다. 제목을 일부 과격하게 단 것처럼 보였지만 내용을 보니 마음이 놓였습니다. “국민의 준엄한 뜻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겸허한 자세로 민심을 듣겠다”, “박 대통령이 직접 국회를 찾아가 국회가 추천하는 총리를 임명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야당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만큼 향후 추이를 고민하고 있다” 등 민심을 수습하려는 의지를 표현해 주고 있었습니다. 

 

시민 인터뷰는 “민주주의가 자리를 되찾고 성숙할 수 있는 계기”,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저희도 어렵게 1대 구해서 지금 올라왔습니다”, “우리나라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나오게 됐고요” 등 약간은 공감이 갈만한 내용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법은 지키라고 있는 것인데 본인께서 그 법을 어겼다면 더 이상 대통령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전 저도 모르게 “수사가 진행 중인데”라는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기자들이 MBC 로고가 없이 현장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약간 의아스러웠습니다. 이후 미국 트럼프를 보면서 자신감도 찾게 됐고, 소방관들이 일할 때 소음에 시달린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기분이 약간 좋아져 국민의 방송 KBS를 봤습니다. 그런데 <끝없는 촛불 최대 규모 집회>라는 뉴스가 나와 놀랐습니다.

 

“‘최순실 게이트’를 규탄하는 시국집회 이른바 <민중총궐기 대회>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열려 지금 이 시각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라는 앵커의 말을 시작으로 기자를 현장 연결해 별 중요하지 않은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 변화한 집회 문화>, <성숙한 시민 ... 평화로운 집회>, <진압 대신 안내 ... 경찰 대응 변화>, <청와대 길목 집회 ... 이중 차벽 설치> 등 19건의 뉴스로 조금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어제 한 뉴스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어제 <靑 “시술 의혹 유언비어 경내서 정상 집무”>라는 ‘앵커&리포트’를 통해 ‘성형 시술 의혹은 유언비어’이며, ‘정상 집무’를 했고, 심지어 ‘내시경을 할 때도 수면 마취를 하지 않는다’고 전하면서 “사실이 아닌데 악의적으로 의혹을 부풀려 보도하는 건 중대한 명예 훼손”에 해당된다고 했습니다.

 

뉴스를 보고나니 ‘격세지감’과 ‘음수사원’이란 말이 떠올라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 힘이 들었습니다. 10월 25일 녹화해 사과문을 내보내기 전까지 방송 3사에서 ‘게이트’는 단연코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단독’을 붙이며 이것저것 내보내고 있었습니다.   

 

지금 일부 언론들은 질문까지 한다고 야단입니다. 제발 ‘음수사원’이란 말을 되새겼으면 합니다. 이러다가 이러려고 질문을 받았나. 자괴감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뉴스는 세상을 보는 창이라고 합니다. 창이 깨끗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아 또 다른 필녀가 산을 내려가고 있군요. 저 역시 따라가 봐야겠습니다.

 

이기범(민언련 웹진기획위원)


** 본 글은 ‘박근혜 대통령’에 ‘빙의’하여 ‘박근혜 1인칭 시점’으로 쓴 것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