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포커스(~2023)_
광화문 집회에 두 개의 진실이 존재할 수 있나?정연구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한림대 미디어스쿨 교수)
(*사진 출처: 연합뉴스)
야당의 어떤 정치인에 국한된 말이나 생각은 아니다. 정치적 노선이 유사한 매체들에서도 ‘광화문 집회와 코로나 확산은 관련이 없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특별히 광화문에서만 더 코로나가 확산되는 것은 아니다’란 말을 하기도 한다. 혹자는 ‘정부를 비판하는 집회에 모이는 것은 안 되고, 시장이나 지하철역, 놀이공원 등에 모이는 것은 괜찮은가?’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광화문 집회 문제없다면 몰상식?
‘사랑제일교회’의 감염자를 조사하면서 역학조사를 해본 결과 광화문 집회가 코로나 확산에 일정 수준 이상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점이 객관적인 자료로 발표됐다. 그럼에도 의료계에 있다는 어떤 사람은 이를 믿지 못하겠다고 SNS 채널에 자료를 내놓기도 했다. 광화문 집회와 같은 상황을 설명하는 데 타당한 자료가 아니라는 다양한 반박이 있어 수그러들긴 했지만 잠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광화문 집회만 금지한 것이 아니다. 지하철, 놀이공원 등에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면서 집합을 금지하고 일정 수준 이상 밀도가 형성되지 않도록 조치했음에도 이런 내용은 안중에 없다는 듯 집회 금지를 비판한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하면 온 힘을 다해 오랜 시간 고함을 지르는 행위를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큰 차이가 있단 것도 알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합리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런 논리를 접할 때면 그 사람들의 양심을 의심했다. 분명히 팩트는 함께 공유하고 있을 텐데 그런 팩트 위에서 어떻게 저런 주장을 쏟아낼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람들이 알고 있는 팩트 자체가 다를 수 있음을 깨닫게 됐다.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확증편향에 의한 특정 매체 집착이 원인이다. 역시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매체는 아무리 중립성, 객관성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현실을 다 보여줄 수 없는 창틀일 수밖에 없어서 특정 매체만 집착하게 되면 현실 자체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인식의 창을 통해 기억하고 해석하는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특정 매체를 통해서 다른 현실을 봤다면 더더욱 현실은 달라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주장이나 평가를 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탓할 일이 아니다.
(*사진 출처:pixabay)
현실 인식, 오류는 없어도 부당은 있다
매체를 접촉하는 수용자만 다른 현실에 살게 될까? 매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현장에 직접 가서 현실을 두 눈으로 직접 보게 되니 매체마다 각기 다른 현실을 볼 수 없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불행히도 그렇지 못하다. 사람들은 모두 선택적으로 노출, 인지, 기억한다. 심리학 등의 정설이다. 심지어 특정 행동을 일단 하게 되면 거기에 맞춰 인지한다는 이론도 있다. 더구나 특정 대상에 대한 공격성향을 갖추고 있는 경우라면 사물을 아무런 편견 없이 보거나 기억하기는 매우 어렵다. 특히 ‘절반의 애매함’이 작동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물이 딱 절반만 차 있는 경우 ‘반밖에 없다’고 볼 수도 있고 ‘반이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좀 오래된 예이긴 하지만 심지어 방송사의 팩트체크에서도 이런 사례를 볼 수 있다. 2018년 최저임금이 한창 쟁점으로 부각되던 시기에 한 방송사에서 사실 검증을 한 결과 ‘한국처럼 지역이나 직종과 관계없이 동일한 최저임금을 적용한 나라는 전 세계에 없다’는 야당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판명했다. OECD 37개 회원국 중에서 29개의 나라가 법으로 최저임금제를 정해놓았고 지역과 직종에 차등을 두지 않는 나라는 21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로부터 약 한 달여쯤 뒤에 이 방송사와 정치적 성향이 다른 방송사에서 보도한 팩트체크에서는 아예 전제부터 달랐다. 차등화에 대한 사용자 측과 근로자 측 주장의 타당성을 따져 보겠다면서 앵커가 기자에게 “외국의 경우는 업종별로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고요?”라고 질문했다. OECD 회원국 중 16개의 국가가 지역과 직종에서 최저임금 차등을 두고 있는데, 이를 ‘상당히 많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를 두고 뭐라 할 수는 없다. 그에게는 그 ‘현실’이 ‘상당히 많다’고 보였을 수 있다.
사람과 현실 사이에서 현실 그 자체는 존재할 수 있지만 인식될 수 없다. 사람에게 현실은 언제나 인식된 만큼 존재한다. 이런 현실 인식을 두고 오류란 말을 붙이기는 어렵다. 다만 타당성 판단은 있을 수 있다. 타당성은 결론이 전제에 부합하는가로 판단할 수 있겠다. 앞서 든 예에서는 많은 사람이 함께 고함을 지르면서 붙어 다니는 집회가 지하철역이나 놀이공원의 상황과 다르다는 전제에 동의한다면 집회를 억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야 타당하다. 두 상황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이에 대한 타당성 검토를 다시 해 봐야 하겠지만. 서로 다른 현실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운명 공동체로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으려면 현실에 대한 부당한 판단은 해서 안 되겠다.
*언론포커스는? <언론포커스>는 언론계 이슈에 대한 현실진단과 언론 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해보는 글입니다. 언론 관련 이슈를 통해 시민들과 소통하고 토론할 목적으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마련한 기명 칼럼으로,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편집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