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주적론’ 등 무기 삼아 대통령 될 수 있겠는가
부질없는 ‘북풍 몰이’ 접고 평화의 길로오는 5월 9일에 치러질 19대 대통령 선거까지 보름밖에 남지 않았는데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시대착오적이고 비생산적인 ‘주적 논란’ 등 ‘북풍 몰이’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거기 앞장선 대표적 정치인은 바른정당 대선 후보 유승민과 자유한국당 후보 홍준표이다. 유승민은 지난 19일 밤 10시부터 열린 ‘KBS 초청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 문재인에게 돌발적으로 “북한이 주적인가”라고 물었다. 대선 때마다 극우보수세력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북풍 몰이’를 전국의 유권자들이 생방송으로 보고 있는 텔레비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었다. 문재인이 “그런 규정은 대통령으로서는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자 유승민은 “국방부의 국방백서에 우리나라의 주적은 북한이라고 나온다”고 주장하며 “북한이 주적인가, 아닌가”라고 OX형의 단답을 요구했다. 문재인은 이렇게 응수했다. “대통령은 남북 간 문제를 풀어가야 할 입장이다. 필요할 때는 남북정상회담도 해야 한다. 국방부가 할 일이 있고 대통령이 할 일은 따로 있다.”
△ 지난 19일, KBS 대선 토론회에서 유승민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출처 : KBS 대선후보 초청토론 화면 캡처>
홍준표 역시 ‘북한은 주적’이라는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 문재인을 향해 “대통령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몰아붙였다. ‘주적 논란’에는 국민의당 후보 안철수도 가세했다. 그는 KBS TV토론 바로 이튿날인 4월 20일 한국방송기자클럽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유승민의 ‘북한 주적론’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미 국방백서에 북한은 주적이라고 명시돼 있다. 지금은 남북 대치 국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주적이다.” 안철수는 이런 단서를 붙이기는 했다. “(북한은) 주적임과 동시에 우리의 대화 상대다. 결국 평화통일의 상대라는 점에 우리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대선 토론회를 잠식하는 ‘송민순 메모’
선거일을 18일 앞두고 대선 후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지난 21일 ‘북풍 몰이’에 ‘최적’이라고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재가 등장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외교부장관을 지낸 송민순이 “2007년 유엔 총회 당시 북한 인권결의안 표결에 관해 노무현 정부가 ‘기권’을 최종 결정하기 앞서 북한의 의견을 물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 지난해 10월 중순 송민순이 펴낸 자서전(<빙하는 움직인다>)의 내용 일부 때문에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이 떠들썩하게 보도한 것이었다. 지난해 10월 29일 주말 ‘촛불집회’가 시작된 뒤 언론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던 송민순 회고록 파동의 소재가 이번에 달라진 점이 있다면, “노무현 정부가 유엔의 북한인권결의안 투표에 관해 최종 결정을 내리기 전에 당시 국정원장 김만복이 북한에서 받은 의견이 담겨 있다”는 ‘메모’를 제시한 것이었다. 문재인은 송민순이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관해 ‘2탄’을 터뜨린 바로 그 날 기자들을 만나 이렇게 설명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송 전 장관이 주장하는 11월 16일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기권이라는 방침이 먼저 결정됐느냐, 아니면 결정되지 않고 북한에 먼저 물어본 후 결정했느냐라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는데 16일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기권 방침이 결정됐다.” 그는 “송 전 장관이 제시한 게 전통문으로 보이는데 그 문서가 북쪽에서 온 것이라면, 거꾸로 국정원이 그에 앞서 보낸 전통문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월 22일 자 주요종합지(조간) 가운데 8개 신문이 1면 머리에 송민순의 ‘메모’ 내용을 보도했다. ‘주적 논란’의 열기가 가시기도 전에 송민순이 제시한 문건이 태풍 아닌 ‘북풍의 눈’으로 등장한 것이다.
△ 송민순 전 장관의 ‘내 회고록은 맞고 문재인 후보는 틀렸다’는 주장을 단독 보도한 중앙(4/21)
유승민은 일요일인 23일 밤 8시부터 시작된 중앙선관위 주관 ‘대선후보 정치분야 TV토론회’에서 송민순의 주장을 ‘호재’로 삼아 문재인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유엔 북한인권결의안에 대해 다시 묻겠다. 문재인 후보가 그 결의안에 대해서 사전에 북한 김정일에게 물어봤냐, 이 질문에 대해 작년에는 기억이 안 난다, 올해 2월에는 국정원을 통해 확인했다고 했고, 지난 13일 토론에서는 국정원을 통해서 상황만 진단해 봤다, 이렇게 말했다. (···) 비록 10년 전 일이지만 북한의 인권이라는 매우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문 후보가 만약 거짓말하고 계신다면 후보 자격이 없다. 거짓말로 들통날까 봐 계속 말 바꾸기 하는 거 아니냐, 이런 느낌이 든다.”
유승민의 ‘거짓말쟁이 의혹’에 대해 문재인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지난번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가 저에게 거짓말 이런 표현을 썼는데 유승민 후보가 또다시 거짓말 표현 썼다. 제대로 확인해보기 바란다. 여러 번 말했듯 사실 아니다. 오늘 그 당시(2007년) 11월 16일 대통령(노무현) 주재 회의에서 대통령이 기권으로 결론 내렸다라고 그 회의에서 배석하고 기록했던 당시 연설기획비서관이 경위를 밝혔다. 또한 11월 18일 회의에 배석해서 회의 내용 기록했던 당시 국가안보전략비서관이 당시 녹음과 함께 사실 관계 밝혔다.”
유승민은 문재인의 해명에 아랑곳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이실직고’하라고 재촉했다. 홍준표는 아예 그림판까지 들어 보이면서 문재인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였다. 그는 문재인의 ‘거짓말 사례’ 다섯 가지 가운데 두 번째에서 “송민순 장관 관련 얘기 이것도 내가 보건대 송민순 장관 증언에 의하면 거짓말”이라며 “거짓말하는 사람이 대통령 되면 안 된다”고 비난했다.
대선을 난장판 만드는 ‘북풍 몰이’를 멈춰라
송민순의 주장이 옳은지, 문재인의 반박이 타당한지는 국정원이 관련 기록을 공개해야 밝혀질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 정작 심각한 문제는 송민순이 지난해 10월부터 이번까지 두 번에 걸쳐 ‘공무상 비밀 누설’에 해당할 수 있는 행위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진한(알권리연구소장)은 인터넷매체 프레시안 4월 21일 자에 기고한 글(‘송민순 문서 공개는 위법, 진본이라면 더 큰 문제다’)에서 그 문제의 핵심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형법 제127조에 따르면 공무원 또는 공무원이었던 자가 법령에 의한 직무상 비밀을 누설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이를 위반할 시,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되어 있다.” 그는 “2012년 대선 당시 NLL 포기 발언 논란도 결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인 것으로 드러났으나 법적 책임을 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상기시켰다.
△ 형법 127조에서는 공무원의 공무상 비밀 누설을 금지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여기서 ‘북풍 몰이’에 몰두하는 대선 후보들에게 반드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당신들은 이번 조기 대선의 역사적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현재 파탄 상태에 빠진 남북관계를 빌미로 북풍 몰이를 함으로써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가?’ ‘정책 대결보다 치졸한 인신공격에 몰두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본래 오는 12월에 실시될 예정이던 19대 대선이 7개월이나 앞당겨진 이유는 헌재가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박근혜 탄핵을 일구어낸 주역이 연인원 1300만 명이 넘는 촛불시민들이었음은 물론이다. 정치인들은 광장의 혁명적 열기에 힘입어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을 통과시켰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선 후보들은 그 많은 시민들이 열망한 ‘진정한 민주평화정부 수립’을 지상과제로 삼고 생산적 경쟁에 나서야 하지 않는가? 특히 박근혜의 국정농단에 공동책임을 져야 할 자유한국당과 그에 버금가는 바른정당이 하등의 반성도 하지 않은 채 ‘북풍 몰이’로 대선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은 대다수 유권자들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라도 모든 후보들은 한반도를 뒤덮은 먹구름을 걷어내고 남과 북이 대화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길을 경쟁적으로 찾아 나서야 한다. 8·15 해방 이후 72년이 되도록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채 강대국들의 억압에 눌려 살아야 하는 겨레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면서 확고한 실천 의지를 보이는 진정한 지도자가 나오기를 많은 주권자들이 고대하고 있을 것이다.
김종철(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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