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파시즘 언론을 본다(엄주웅)
등록 2016.02.1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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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개성공단 중단 결정에 대한 보수신문의 정당화

파시즘 언론을 본다

 

엄주웅(전 방통심의위원, 정책위원)

 


 ‘고뇌에 찬 결단’이라고 했다. “(북한 핵 개발을 용인할 수 없다는)결연한 의지를 내보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절박한 상황에서 취한) “비상한 조치”라고도 했다. 지난 10일  전격적인 개성공단 중단 발표에 대한 조선 동아 등 주류 수구 언론들의 평가다. 이런 중차대한 정책의 결정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는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고독한 결단이니 따르자고?
  개성공단 중단이 북한에 대한 실효성 있는 제재수단으로 적절한지의 여부를 사전에 공론화한 적은 없었다. 지난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에도 이들 언론은 핵무장까지 거론하면서도 공단의 폐쇄를 주문하지는 않았다. 1월 22일 폐쇄는 고사하고 개성공단의 안정적 운영을 목표로 밝힌 통일부 업무 보고 때에도 별 말이 없었다. 기껏해야 “중국이 대북 제재를 제대로 취하면서 개성공단에 결단을 요구할 경우”(조선 2월 10일 사설)에 대비하자는 정도였다. 


  그러다 전격적인 중단결정이 발표되자 이들은 개성공단 근로자에게 지불한 임금이 북한 핵개발에 쓰였을 거라는 정부의 근거 없는 추정을 그대로 전하고, 이에 “북한이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 건 그만큼 한국의 조치가 아프고”(중앙 13일 사설), “그만큼 그들에게 (경제적) 타격이 컸기 때문”(동아 12일 사설)이라며 인과도치(因果倒置)와 유사한 비논리를 구사한다. 조선일보는 13일자 보도에서 “정부의 성명은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거의 다 고쳐썼으며... 분노가 담겼다”고 전했다. 이 보도대로 이번 조치는 정부 내에서도 청와대(박대통령)가 거의 독자적으로 주도했으며 그것도 상당히 격앙된 상태에서 밀어붙이다시피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민주주의 나라에서 중대한 정책 결정이 이래도 되는 걸까?  


  대통령이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면 그 고심을 혼자만 할 게 아니라 국민과 함께 해야 하지는 않은가? 자본주의 국가에서 개성공단 중단처럼 국민의 재산권과 기업의 영업 자유를 일시에 침해하는 결정을 내리려면 최소한 여론 수렴의 절차는 거쳐야 하지 않을까? 고도의 통치행위로서 정말 비상한 조치라면 헌법에 따라 국회의 동의를 받아 비상명령권을 발동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 나라의 주류언론들은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외려 “안보문제는 여론을 살필 필요가 없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 국가지도자가 ‘고독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단다.(17일 동아 황호택 칼럼) 개성공단 중단 여부가 안보와 직결된 문제인지, 또 얼마나 많은 전문가의 의견을 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는데도 말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일을 저지르고서는 따라오라는 통치 스타일에 대한 문제 제기 같은 건 아예 없다. “(이런저런) 의견이 나오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기”(동아 11일 사설) 때문이다. 이제 국론을 결집해야 하고 반대의견은 북한이 노리는 남남갈등에 말려드는 꼴이며, 야당의 비판은 선거에서 재미보려는 북풍 선동(12일 조선 사설)이 된다. 특히 졸지에 망하게 된 “개성공단 입주기업들과 정부의 갈등이 국론분열으로 증폭되면 안된다.”(중앙 13일 사설) 그리하여 우리 정부의 책임을 거론하는 입주기업들에게 “다른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조선 13일 사설)하기에 이른다.

 

 

 

△ 개성공단 폐쇄 관련 조중동 사설. 위쪽부터 동아일보(2/11), 조선일보(2/12), 중앙일보(2/13)

 

 

  박 대통령에게 결단에 찬 고독한 영웅의 이미지를 투사하려는 시도는 논설위원들의 기명 칼럼에서 압권을 이룬다. 12일자 동아일보의 박제균 위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역시 고수(高手)”라고 치켜세운 뒤 수천 년 전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 공화정을 끝낸 카이사르에 비유했다. 당시 카이사르군의 이탈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고 사족을 달았다. 정치의 고수인 그가 통치에 그렇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지금은 이를 문제 삼을 때가 아니라고도 했다. 선거에 의해 당선된 지도자가 ‘주사위를 던지면’ 나머지 국민은 모두 따라가야 한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이 민주사회의 공론장에서 떳떳이 활보하고 있는 게 기막힐 따름이다.

 

  박비어천가를 부르는 호위무사
  다음날 이 신문의 다른 칼럼은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데 머무르지 않고 아예 호위무사로 나선다. 수석논설위원이라는 필자는 SNS에서 개성공단 중단을 풍자적으로 비판한 서울대 교수에게 “학자가 페북질에 시간을 쏟는 모습이 한심하다”면서 “박근혜를 희롱하지 말라”고 일갈한다. 그런데 사신(私信)으로도 충분히 소통하면 될 사안을 신문지면에 정색하고 게재한 이유는 뭘까? 글의 허두에 실마리가 있어 보인다. 박근혜는 외환위기 때 눈물을 펑펑 흘리며 거리를 한참 걸었던 애국심이 남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말미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끌어올린다’는 괴테의 명언을 인용하며 알쏭달쏭하게 마무리했다. 


  굳이 해석해보자면 박근혜는 눈물이 많은 여성적인 사람인데 왜 희롱하듯 비판하냐는 의미인 듯하다. 그리 보면 이 글은 한 교수에게 읽히게 하려는 것이 분명 아니지 싶다. 마침 최근 해임된 연세대 황상민 교수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황교수는 2012년 대통령선거 때 박근혜 후보의 여성 대표성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은 적이 있다. 그나저나 이 논설위원께서는 전날 박제균 칼럼의 “박근혜 정권의 유일한 남자는 박근혜”라는 대목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실지 궁금하다, 같은 직장에 있으니 의논해서 독자들께 교통정리라도 좀 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