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언론중재법 개정안 보류해야(정민영)
<시시비비>언론중재위, 중재가 아닌 거대 검열기구를 꿈꾸는가
언론중재법 개정안 보류해야
정민영(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민언련 정책위원)
언론중재위원회가 언론중재법(언론중재 및 피해구제 등에 관한 법률)개정에 나섰다. 2005년 언론중재법이 만들어진지 10년 만이다. 언론을 둘러싼 환경이 그동안 많이 바뀐 만큼, 언론중재 제도를 그에 맞게 정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은 언론 환경의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중재위원회의 기능과 권한을 대폭 확대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세부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언론중재위원회가 ‘중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거대한 검열기구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자기 검열을 강화해 표현의 자유 위축할 것
개정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핵심은 “언론중재절차를 통해 기사를 ‘삭제’하는 일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언론보도의 피해자는 언론중재위원회의 구제절차를 통해 정정보도나 반론보도,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었다. 문제가 된 기사 자체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사를 정정하는 내용이나 그 기사에 대한 당사자의 반론을 함께 싣도록 함으로써 피해자의 권리 구제가 이루어지도록 해 온 것이다. 그런데 이번 개정안대로면 문제가 되는 기사 자체를 아예 검색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기사만이 아니라 기사에 달린 댓글, 기사를 퍼온 글까지도 모두 삭제의 대상이 된다. 언론중재위원회는 이에 대해 “디지털 환경에서의 피해구제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인격권에 기한 침해배제청구권을 신설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언론중재위원회의 설명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기사와 댓글을 삭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사이버세계의 피해자들에 대한 권리구제가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중재위원회는 그것이 가져올 역작용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안이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자신이 쓰는 기사나 댓글이 ‘삭제’될 위험이 커지면, 언론인과 네티즌은 스스로를 더 검열할 수밖에 없다. 어떤 표현을 했다가 삭제되는 일을 겪기보다는 침묵하거나 ‘안전한’ 표현으로 수위를 조절하는 쪽을 선택하게 되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인터넷 공간에서의 의사소통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표현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명예를 훼손할 자유는 아니지 않느냐”라는 말로 넘어갈 만큼 단순한 것이 아니다.
기존 임시조치제도로도 충분히 가능한 게시물 삭제와 차단
먼저 살펴볼 점은 지금까지 인터넷게시물을 삭제하거나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냐는 것이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정보통신망법에는 임시조치제도라는 게 있다. 인터넷상 게시물에 대하여 피해자가 요청하면, 인터넷사이트 운영자(사업자)는 해당 게시물에 대하여 무조건 30일 동안 블라인드처리를 하게 되어 있다. 글의 게시자가 30일 이내에 복구신청을 하지 않으면 해당 게시물은 삭제된다. 이렇게 해서 최근 5년 동안 포털에서 삭제된 게시물은 143만 건에 달한다. 이미 규제가 지나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언론중재위가 기사 뿐 아니라 댓글과 펌글에 대한 삭제 권한을 갖게 될 경우, 인터넷의 접근가능성과 개방성, 자율성이 손상될 수밖에 없다.
언론중재위가 말하는 ‘잊혀질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라는 개념 역시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까지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다. 어느 범위까지 잊혀질 권리를 인정할지에 대해 구체적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이 권리를 덜컥 법제화하면, 심각한 위험들이 초래될 수 있다. 보존되어야 할 기록이 당사자의 주장만으로 삭제되는 일이 벌어질 위험,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에 대한 부정적 언급을 온라인에서 지우는 수단으로 ‘잊혀질 권리’를 남용할 위험. 이 위험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에 대해 언론중재위원회는 “침해가 중대하거나 계속되는 등의 엄격한 기준이 충족되어야만” 삭제가 가능하도록 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불명확하고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정부와 고위공직자에 대한 비판을 틀어막는 수단으로 악용될 가능성 높아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이번 법 개정이 보통 사람들의 명예와 인격권을 지키기보다는 정부와 고위공직자에 대한 비판을 틀어막는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정부가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정부정책에 대한 문제제기나 비판을 틀어막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많은 사람들은 기사나 댓글에 대한 삭제가 가능해질 경우, 행정기관인 언론중재위원회가 법원 이전 단계에서 선제적으로 게시물을 통제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가장 참여적이고 표현 촉진적인 매체’인 인터넷의 순기능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이번 개정안은 보류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