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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같지 않은 말들(안성일)
등록 2015.10.1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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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정치인의 언행을 감시해야 하는 책무 방기한 언론

말 같지 않은 말들

안성일(전 MBC 논설위원)

 

던져놓고 보는 말

“대한민국 국사학자는 90%가 좌파로 전환됐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 17일 고양시 행주산성에서 열린 새누리당 중앙위원회 산악회 발대식에서 했다는 말이다. 김무성 대표가 ‘좌파’라는 단어를 어떤 함의를 가지고 썼는지도 따져봐야겠지만 자신은 좌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명확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중요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말 한마디가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김 대표가 ‘대한민국’, ‘국사학자’, ‘90%’, ‘좌파’, ‘전환’이라는 단어를 엮어 만든 문장이 마치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김 대표의 발언은 대부분의 매체가 보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발언의 근거에 대해 묻는 기사는 적은 모양이다. 적어도 나는 아직 듣고 보지 못했다.

 

현역에 있을 때, 여론조사결과를 보도할 때는 특히 신경을 쓰라고 배우고 가르쳤다. 자칫하면 심의에 걸리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의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2장 제2절 제14조 객관성 조항은 ‘사실을 정확하고 객관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야 하며, 불명확한 내용을 사실인 것으로 방송하여 시청자를 혼동케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제16조 통계 및 여론조사 조항은 ‘통계조사 및 여론조사 결과를 방송할 때에는 의뢰기관, 조사기관, 조사방법, 응답률, 질문내용, 조사기간 및 오차한계 등을 시청자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자막 또는 음성으로 밝혀야 한다. 다만, 여론의 형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통계조사의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고 규정했다. ‘다른 언론에서 이미 공표된 복수의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하여 전체적인 여론의 추이를 언급하는 경우에는 여론조사의 의뢰기관 및 조사기간 만을 밝혀 방송할 수 있다’는 조항도 있다.

 

근거 없는 말

김무성 대표의 발언의 근거를 찾아보았다. 김 대표의 발언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관한 것이니까 박근혜 정부가 국정화 움직임을 보인 후부터의 여론조사를 찾았지만, 막강한 인터넷 어디에도 ‘대한민국’, ‘국사학자’를 대상으로 ‘당신은 좌파인가?’를 물은 여론조사는 없었다. ‘우파에서 좌파로 전환했는가?’를 묻는 질문도 당연히 없었다. ‘90%’라는 팩트가 비슷하게 등장하는 기사를 찾기는 했다. 10월 19일 경향신문 4면, 송현숙 기자가 작성한 기사에 ‘역사교과서 국정화 입장’이란 도표가 나왔다.

 

 

△ 2015년 10월 19일 경향신문 4면 기사 갈무리


국정화에 반대 선언를 한 교수가 2627명, 집필거부를 한 교수가 38개 대학 280명, 찬성 선언을 한 교수가 102명이었다. 학회는 2014년에 17개 학회가 반대 선언을 했고, 집필을 거부한 학회가 2곳이었다. 찬성 선언을 한 학회는 한 곳도 없었다.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2014년 7월11일부터 17일까지 역사교사 858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97%가 반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모두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의견을 묻는 조사이거나 행동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한민국의 국사학자를 대상으로 이념성향을 묻는 조사를, 또 어떻게 전환했는지 추적조사를 한 기관이 없을 것 같다.
김무성 대표는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한다. 근거를 밝혀야한다. 대한민국 국사학자 열에 아홉을 ‘좌파’라고 국민들에게 고발한 셈이니까 의심의 여지없는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정치꾼의 말을 감시할 책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운동 기간 중 경북 안동에 간 적이 있다. 오전에는 안동시내의 한 초등학교에서, 오후에는 의성시장에서 합동유세가 있었다. 당시 안동교도소는 지금의 안동시 평화동에 있었는데 풍산읍으로 이전이 결정된 상태였다. 한 후보가 오전 시내 유세에서는 ‘양반, 학자의 고장 안동시내에 교도소가 있는게 말이 되느냐? 그래서 옮기게 했다’고 말하고는, 오후 시장 유세에서는 ‘여기 살림도 어려운데 교도소 면회 오는 사람들에게 국밥이라도 팔아 생활할 수 있게, 교도소를 여기로 옮기게 힘썼다’며 표를 호소했다. 정치인, 또는 정치가가 아닌 정치꾼의 ‘말 아닌 말, 말 같지 않은 말’의 전형으로 내 머리에 남아있다. 
 
내년 4월 13일에 제20대 국회의원을 뽑는다. 김무성 대표도 출마할 것이고, ‘바람직한 것은 자유발행제’, ‘국정을 영원히 하자는 것은 아니다’란 발언을 방송에 출연해 한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도, ‘이 지구에 오후 4시에 문 닫는 금융기업이 한국 말고 또 있나?’란 말을 한 최경환 경제부총리도 출마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는 보도다. 언론이 후보자들 입으로 만들어 내는 이슈에 휘둘리지 말고, 그 말의 근거에 대해 질문하는 일이 더욱 중요해진 때다.
 
불설시가라월육방예경(佛說尸迦羅越六方禮經)에 "친구 중에는 나쁜 벗이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속으로는 원망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겉으론 친한척하는 것이요, 둘째는 앞에서는 칭찬하고 돌아서서는 험담을 하는 이며, 셋째는 급한 일이 있을 때에 그 사람 앞에서는 근심·걱정하는 체하고 돌아가서는 기뻐하는 이며, 넷째는 겉으로는 친한 체 하면서 속으로는 원망하고 모략하는 이 등이니라.“라는 가르침이 있다. 척하고 체하는 정치꾼들이 당선되어, 또 4년을 흘려보내지 않도록 언론이 ‘말 같지 않은 말, 말 아닌 말’을 가려내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