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태극기 훼손’ 청년을 포토라인에 세운 경찰, 정당한가?(정민영)
[시시비비] 제멋대로인 경찰의 포토라인(photo line) 운영
‘태극기 훼손’ 청년을 포토라인에 세운 경찰, 정당한가?
정민영(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 민언련 정책위원)
얼마 전, 태극기를 태운 20대 청년(편의상 김 씨라고 부르자)이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적이 있었다. 지난 4월 광화문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1주기 집회에 참가한 김씨는, 현장에 있던 태극기(정확하게는 태극기가 인쇄된 종이)를 태웠다. 시위대에 물대포를 쏘고 캅사이신을 뿌리는 경찰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뒤 조선일보 1면에 ‘태극기 불태우는 시위대’ 라는 제목으로 김 씨의 사진이 실렸고, 김 씨를 체포하기 위한 경찰 수사팀이 꾸려졌다. 몇 주가 지나, 그는 어머니의 집에 갔다가 잠복하고 있던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변호인이었던 나는, 그날 저녁 체포 소식을 듣고 경찰서에 가서 김 씨를 만났다.
다음날 아는 기자의 전화를 받았다. ‘경찰이 기자들에게 문자로 “태극기를 태운 김 씨를 잡았으니 오후 X시에 서울지방경찰청 정문으로 오면 포토라인을 만들어 김 씨를 촬영할 수 있다”고 알렸다는 것’이다. 나는 경찰 관계자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근거로 김 씨를 포토라인에 세우려는 거냐. 그가 언론에 나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다. 경찰은 “혹시라도 기자들이 몰려 혼란스러워질까봐 미리 알렸다. (포토라인에 세울 것인지 여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계속 항의했더니 “김 씨에게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게 하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결국 그날 오후에 마스크와 모자를 쓴 김 씨의 모습이 방송으로, 인터넷으로 퍼져나갔다.
‘포토라인’, ‘국민의 알권리’를 빙자한 경찰의 성과 자랑으로 남용되기도
포토라인(photo line)은 지나친 취재경쟁으로 인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만든, 일종의 취재경계선이다. 언젠가부터 유명인, 알려진 사건의 당사자가 포토라인에 서는 것은 당연한 관행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수사기관 현관에서 카메라 수십 대가 포토라인을 치고 기다리고 있으면, 당사자로서는 거부하기 힘든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그 앞에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거나 묘한 표정을 지었다가는 ‘반성의 기미가 없는 파렴치한’이 될 수 있다. 어떻게든 포토라인에 서는 일만은 피하고 싶은 당사자와 수사기관이 이를 두고 협상을 벌이는 일까지 생겨난다.
조사받으러 온 사람을 반강제로 취재진 앞에 세우는 것이 당사자의 초상권을 침해하는 일이라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법원의 유죄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누구든 무죄로 추정된다’라는 헌법의 원칙과 배치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포토라인이라는 관행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얼마간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켜준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수사기관이 ‘국민의 알권리 충족’ 등을 구실로 이 관행을 남용하고 있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중범죄자라는 이유로 압송 과정에서 피의자의 얼굴을 그대로 노출시키는가 하면, 이번 사건처럼 그저 자신들의 성과를 알리기 위해 피의자를 포토라인에 세우는 일도 벌어진다. 정작 포토라인에 세울 필요가 있는 고위공직자의 경우 기자들을 피해 슬그머니 조사를 받고 가도록 협조해주는 일도 있다.
포토라인 운용 ‘수사공보준칙’, 만들어놓고도 지키지 않는 경찰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에서는 “사건 관계인의 초상권 보호를 위하여 소환, 조사, 압수수색, 체포, 구속 등 일체의 수사과정에 대하여 언론이나 제3자의 촬영·녹화·중계방송을 허용하여서는 아니된다”라는 원칙을 정했다. 준칙에서는 이와 동시에 예외적으로 포토라인에 세울 수 있는 경우를 정해놨는데, “1.공적 인물인 피의자에 대한 소환 2.촬영경쟁으로 인한 물리적 충돌이 예상되고 피의자가 동의하는 경우”이다. 고위공직자나 정치인, 재벌 회장과 같은 공적 인물이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당사자에 대한 초상권을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태극기 청년의 경우, 이 중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이처럼 기준 없는 포토라인 운용은 언론의 선정 보도를 조장할 뿐만 아니라, 사건에 대한 여론을 수사기관의 의도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별 것 아닌 사건을 키워 국민의 공분을 향하게 하고, 정작 국민적 의혹이 제기된 사건을 축소하는 데 포토라인이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위공직자 등 공적 인물을 예외로 하고, 지금처럼 피의자를 함부로 포토라인에 세우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