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저널리즘은 시장전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서명준)
<시시비비> 저널리즘을 위한 변명
저널리즘은 시장전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서명준(민언련 정책위원‧언론학 박사)
요즘 한국 현실을 보면 이처럼 계몽이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가 또 있을까 싶다.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던 불후의 대철학자 칸트(I. Kant)의 말씀이 오늘처럼 절실하게 다가올 때가 없다. 상식과 합리성 원리가 올바로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도 문제지만, 합리적인 비판과 계몽의 견인차인 저널리즘이 오히려 계몽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은 참담하기까지 하다.
디지털 사회에서 소통의 형식은 다양해졌지만, 저널리즘은 시민들과의 소통에서 소외되는 역설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언론이 전체주의화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자유로운 개인보다 집단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현상이다. 그것은 모든 사회 영역에 걸쳐 전면적이고 실질적인 통제를 가하게 된다.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처럼 직접적인 언론 통제를 가하는 기관이 없음에도 오늘날 한국 언론을 전체주의화 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시장(市場)이다. 계몽과 합리주의가 아닌 시장전체주의가 언론을 견인하고 있다.
“무당파도 당파다”
언론사만큼 자신의 생산물이 ‘상품’이라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기업은 찾기 어렵다. 또 언론사만큼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특성을 무시하는 기업도 드물다. 따라서 대중에게 ‘뉴스라는 상품’은 빵과 같은 다른 상품과 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이 인식명령은 시장이 내린 것이다. 빵이 좌도 우도 부자도 빈자도 가리지 않고 동등하게 먹는 음식이듯, 뉴스도 그래야 한다는 명령이다. 관점이 있는 빵이 없듯, 뉴스도 관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시장의 주문은 오늘날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이 주문에 맞춰 금융·스포츠·연예기사 같은 중립적이고 오보를 덜 내는 단순보도가 엄청나게 늘었다. 단순 사실보도는 ‘불량품’이 적게 발생하기 때문에 객관보도라는 미명하에 대량생산되고 있다. 빵은 좌·우나 부자·빈자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동일한 맛이다. 시장은 빵과 같은 이데올로기 없는 객관보도를 대량 주문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뉴스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는 것일까. 뉴스의 전달수단인 언어에는 권력과 지배관계에 의해 규정된 현실이 들어있다. 또 뉴스의 원천인 정보는 다양한 세력의 이해관계로부터 발생한 것이지, 아무런 맥락 없는 파편물이 아니다. 하나의 정보는 수많은 외적 관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다양한 세력의 힘에 따라-이데올로기에 따라-뉴스가치 또한 달라진다. 유일하게 객관적인 것은 이러한 메커니즘에 기자들이 종속되어 있다는 점일 뿐이다. 하지만 정보 선택도 주관적임을 감안하면, 객관보도의 자리는 더욱 좁아진다. 중립적·객관적이고자 하는 것조차 당파적이고 주관적이다. 무당파도 당파다.
시장 속에서 기자 능력을 거세당하고, 자기계발을 강요당하는 기자
△ 2013 언론인 의식조사_ 언론 자유를 직·간접적으로 제한하는 가장 영향력이 큰 요인(단위: %)
시장명령에 따르는 전체주의 언론에서 고달픈 삶을 사는 존재는 누구보다 언론사 기자들이다. 회사의 수익을 고려해야 하는 기자들은 명확한 관점을 갖고 실체적 진실을 분석하는 능력을 거세당하고 있다. 심지어 광고를 염두에 두고 기사를 쓰는 기자도 늘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2013년 실시한 기자의식조사를 보면,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요인이 ‘광고주’라는 응답이 1위를 차지했다. 기자들의 광고영업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지급하는 언론사도 있다고 한다. 인터넷 판 마감 탓에 법정근로시간 초과 노동은 이미 오래된 일인데다, 최근에는 로봇기자마저 등장했다. 기자들은 이제 엄청난 생산성을 자랑하는 뉴스기계와 경쟁해야 할 처지이다. 기자 개인의 브랜드를 특화시키고 스타기자가 되라는 주문도 나온다. 이슈코디네이터, 소셜디자이너가 되라는 주문이다. 크라우드소싱 저널리즘의 선구자인 폴 브래드 쇼 버밍엄대학교 교수는 미디어오늘과의 인터뷰에서 “미래의 기자들은 기사를 쓰는 행위나 취재가 기자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제 기자는 ‘대중과 호흡해야 하고’, ‘주류문화를 성찰해야하며’, ‘기사쓰기 기법도 고민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데이터저널리즘도 구현해야 한다’. 다만 이를 위한 회사의 재정지원은 없다. 기자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지원할 생각이 있다는 언론이 늘고 있다지만 적어도 정말 지원할 때까지는 기자 혼자 감내해야 한다. 시장명령에 복종하는 자는 흥하고 거부하는 자는 필패하는 구도가 점점 심화되고 있다.
저널리즘의 “세포” 구조를 대해부 해야
지난달 언론소비자주권행동이 개최한 제5회 언론소비자학교에서 강연한 뉴스타파의 최경영 기자는 KBS 재직시절 객관성·공정성의 모호함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다. 관점이 있는 분석보도를 위해 과감히 세상 밖으로 나왔으며 저널리즘의 미래를 창출하겠다는 기자의 자신감은 시민들에게 든든한 믿음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관점을 상실한 맹목적인 ‘기레기’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저널리즘의 몰락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중립성과 객관성을 대량 주문하는 시장전체주의가 다양성을 훼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라까이(기사베끼기)가, 똑같은 프로그램 포맷이 판을 친다. 기사는 서로 비슷하고 TV는 온통 요리 중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시장전체주의로부터 언론을 건져내기 위해서는 바로 그 시장의 본질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뉴스상품이라는 저널리즘의 “세포”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왜 뉴스를 생산하는가. 그것도 상품으로서. 언론은 시장전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상품으로서 생산하지 않는 저널리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오래 걸리더라도 세포의 구조를 해부해야 비로소 이 질문에 정확히 답할 수 있다. 이 거대한 미디어시스템의 진화 방향도 가늠할 수 있다.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느리더라도 정확한 것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