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역사를 왜곡하는 청와대와 언론(이용마)
<시시비비> 박 대통령의 '메르스 환자수'발언에 대한 청와대 '마사지' 비판
역사를 왜곡하는 청와대와 언론
이용마 정책위원·MBC 기자
사초를 수정하는 역사
조선시대 왕의 언행은 사관들에 의해 매일매일 기록(사초)으로 남았다. 조선은 왕조차도 재임 중 사초를 보지 못하게 했다. 혹여 왕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을 고쳐 역사를 왜곡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실제 조선의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이 사초를 보고 사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연산군 시절의 기록만은 ‘실록’이라 하지 않고 ‘연산군일기’라고 부른다. 연산군이 스스로 사초를 수정한 행위에 대한 책임을 역사가들이 물은 것이다.
그런데 사초를 무단으로 열람하거나 수정해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 이명박 정부 이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왜곡해 정쟁을 일으킨 사례가 대표적이다. 숱한 지탄에도 불구하고 사초를 무단으로 열람한 행위는 정쟁에 묻혀버렸다.
굳이 지난 역사만이 문제는 아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대통령의 공식적인 발언을 소위 “마사지”해서 언론에 전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이명박 정부는 이를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강변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이 “마사지”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박 대통령이 메르스 문제를 언급하면서 환자의 수를 틀리게 말한 부분을 임의로 수정해서 언론에 알리고, 영상기록물에서 대통령의 틀린 발언을 아예 삭제해버린 것이다.
환자 수 오류 발언에서 나타난 문제
대통령이 국가의 모든 부문에 다 정통할 수 없기 때문에 다소 틀린 말을 할 수 있다.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중대사안에 관한 것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국가 중대사안에 대해 대통령이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다면 국정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메르스 발언의 경우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박근혜 대통령은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지 무려 13일만에야 처음으로 이 문제를 언급했다. 그런데 정부가 3시간 전에 밝힌 환자의 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
우선 박근혜 대통령 자신이 메르스 문제를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 박 대통령의 메르스 발언은 공무원연금법과 국회법 개정 사안에 이어 세 번째 순서에 배치되었다. 박 대통령이 생각하는 국정의 우선순위를 그대로 보여준다. 메르스 방어에 실패한 뒤 첫 언급을 하면서도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보았던 것이다. 정부의 초기대응이 미흡했음을 지적한 박 대통령의 질타는 대통령 본인이 받아야 할 몫이었지만, 본인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는 메르스의 무차별적인 확산으로 나타났다.
다음은 박근혜 대통령의 권위주의적인 행태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대단히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비서진들과 이야기를 나누듯이 박 대통령이 접근하기 편한 사람이었다면, 청와대 비서진 중 누군가는 사전에 이를 확인했을 법하다. 아니, 대통령 발언이 나온 그 자리에서라도 누군가 정정을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몸에 밴 권위주의는 이런 대화와 토론을 철저히 가로막는 장벽이다.
끝으로 청와대 비서진들의 잘못된 역사인식과 책임회피 의식이다. 국민은 국가의 지도자인 대통령이 현재의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문제를 어떻게 풀 생각인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야 대통령의 잘못이 있을 때 빨리 정정할 수 있다. 장삼이사의 오류는 본인의 피해로 그치지만, 대통령의 오류는 국가 전체의 중대 상황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와대 비서진들은 당장의 책임회피에만 급급해 대통령의 실제 언행과 다른 정보를 전달해 오류를 바로잡을 기회를 없애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일기’를 쓰는 언론
사실 이 모든 문제를 그대로 온존시키는 더 큰 문제가 있다. 박 대통령이 주재한 회의에는 소위 ‘풀기자’(기자 대표)가 참석해서 직접 회의 장면을 지켜보고 기사를 작성했다. 그런데 자신의 기사가 청와대에 의해 멋대로 바뀌어서 다른 언론사에 전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묵인하고 동조한 점이다. 다른 기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청와대가 사실과 다르게 제공한 정보로 잘못된 기사를 작성했다면, 그 후라도 정정을 하고 청와대를 질타해 재발을 막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언론은 이 문제를 그저 해프닝 정도로 취급했다.
기자는 현대판 사관이다. 매일매일 기록을 하며 역사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후세의 사가들이 2015년 6월 1일자 “마사지”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청와대가 사초를 사전에 열람하고 수정(“마사지”)을 하고, 사관들이 거기에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다면, 그것은 역사가 아니라 ‘청와대 일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