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너희가 샤를리라고? (엄주웅)
등록 2015.01.2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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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우리언론의 이중잣대

너희가 샤를리라고? 




엄주웅(민언련 정책위원, 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상임위원) 


세상만사에 단순하기만 일이 어디 있을까만, 새해 초부터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프랑스 파리에서의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도 처음에는 그래 보였다.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심장을 쏜”(경향) “반문명적이고 야만적인 테러”(중앙)이며 “자유 민주사회에 대한 심각한 도전(동아)”이라고 했다. 유럽 전역에서는 이슬람 극단주의를 배격하고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나는 샤를리”라는 팻말을 든 시위가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몇몇 신문과 방송도 스스로 샤를리라며 공감을 표했다. 


보수신문, <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분노하고 ‘종북콘서트’ 황산테러는 ‘용인’ 


하지만 사정을 좀 더 파보니 그리 간단히 규정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표현의 자유와 그 한계, 언론의 사회적 책임에서부터 이른바 ‘똘레랑스’와 다문화사회의 문제, 나아가 서구적 가치와 이슬람 간의 문화충돌에 이르기까지 복잡 ’미묘’한 측면을 가진 사건이었다. 여기서 미묘하다는 뜻은 나라 안의 사정에 비추어 보면 더 잘 살아나는 것 같다. 


우리는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 가치”(동아 사설 1/9)임을 잘 안다. 이는 좌든 우든 진보-보수를 막론하고 동의한다. 그러나 일체의 권위에 대한 부정과 성역과 금기를 허무는 <샤를리 에브도>식 표현의 자유를 우리나라의 극우신문들이 최대한 부각하고 옹호하기에는 어딘가 꺼림칙한 구석이 있어 보인다. 


그러려면 몇 해 전 발행되어 정부의 우수도서 추천까지 받은 재미교포 신은미 씨의 북한 여행기와 토크쇼를 ‘종북콘서트’로 몰아 그를 추방하고 관련자를 구속한 일은 과연 부당한 억압에 해당하지 않은지 설명해야 한다. 사실을 날조하고 신상을 털며 낙인부터 찍어 타인의 표현의 자유를 봉쇄하려는 극우언론의 행태는 “미친 마녀사냥”(동아닷컴 주성하 블로그)이라 부르기에 충분했다. 또한, 지금 언론에 대한 반문명적 테러를 규탄하는 만큼 당시 토크쇼 행사장에서 폭발물이 투척된 일도 심각히 우려하고 준엄히 꾸짖었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테러’라는 표현을 아끼며 ‘인화물질 투척’ 찬반 논란을 보도하여, 이를 용인하는 시각을 소개했다. 동아일보의 한 논설위원은 미성년자인 범인이 던진 ‘로켓캔디’가 얼마나 살상력을 가졌겠느냐며 엉뚱하게도 이에 대해 관용을 보이지 않는 진보논객들을 비난했다. 


한편 프랑스 테러 사건과 국내 언론 상황을 직접 연결 지은 건 신문협회였다. 협회의 테러 규탄 성명은 ‘청와대 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취재기자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언론자유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비판하며, 박근혜 정부의 세계일보에 대한 고소를 <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비슷하게 간주했다. 그러나 지면에서 이런 논조를 보인 곳은 당사자인 세계일보와 성명 전문을 게재한 중앙일보 외엔 없었다.    


‘대북전단 살포행위 제한’ 표현의 자유 침해, 신은미는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 있다


생각할 거리는 더 있다. 최근 보수단체의 대북전단 살포행위에 대해 법원이 제한을 정당화하고 정부가 자제를 요청한 것도 그간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해 왔던 일부 극우언론을 곤혹스럽게 할 수 있다. 모처럼 조성된 남북대화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무조건 표현의 자유를 앞세울 일도 아닌 듯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고민의 해결책은 단순하게 사고하는 것인가 보다. 동아일보는 의정부지법의 대북전단 관련 판결은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북한 독재정권의 협박에 굴복한 선례를 남겼다”(<황호택 칼럼>1/14)고 썼다. 그들이 보기에 북한과 이슬람극단주의는 같다. 둘 다 “자유민주주의 가치 안에서의 합리적 비판이나 풍자를 수용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폐쇄집단”이다. 북한이 대북전단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도 “자유민주주의의 근본가치인 표현의 자유와 언론자유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동아일보> 1월 17일 27면 보도 갈무리


이처럼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희한한 논리가 이른바 ‘종북 콘서트’와 신은미 씨 추방에는 어떻게 적용될까?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의 근본 가치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 아닐까? 힌트는 동아일보 <횡설수설/종교적 신성과 표현의 자유>(1/17)에 언뜻 비친다. 칼럼은 “우리나라에서 북한 체제를 찬양 고무하는 발언이 허용되지 않듯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는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종교적 신성과 관련해서는 다르다고 생각”한단다. 다시 말해 <샤를리 에브도> 식의, 또는 종교에 관한 한 표현 자유는 한계가 없지만, 자유민주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북한에 관한 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이야기다. 필자는 이른바 ‘종북 콘서트’장에 폭발물을 던진 고교생을 왜 관용하지 않느냐고 묻던 그 논설위원이다. 


최근 어떤 뉴스채널에서 인천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을 다루면서 패널 중 한 명인 탈북자 출신 작가에게 논평을 부탁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북한에서도 저렇게 팹니까?” 패널이 대답했다. “북한에도 저런 거는 없습니다.” 원하는 대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사를 북한에 비교하던 그 옛날 남북대결 시대가 떠올라 씁쓸했다. 어쨌든 북한은 우리나라 극우 언론이 기대는 적대적 공존 상대이자 그토록 단순한 사고의 오아시스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