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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야후’는 누구인가? (김은규)
등록 2014.08.2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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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세월호 국면에 드러난 보수언론의 본색

이 시대의 ‘야후’는 누구인가?



김은규 (민언련 웹진기획위원장)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누구나 아는 ‘아동소설’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내용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잘못 알려진 것이 아니라 작가의 위험한 상상력을 제거하고 아동용 도서로 둔갑시킨 것이다. 사실 <걸리버 여행기>는 18세기 초반 인간군의 세태를 날카롭게 들여다 본 정치사회 소설이다. 소인국과 거인국,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 그리고 말들의 나라라는 동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손상되어가는 인간의 본성을 풍자한다.


문제는 조나단 스위프트가 인간의 이성에 회의적인 시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기보다는 ‘이성적일 수 있는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이성을 강조하던 계몽주의 시대에 이 같은 이성에 대한 회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때문에 <걸리버 여행기>의 위험한 내용들을 삭제하고 아이들이 읽기 좋은 동화책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조나단 스위프트가 ‘이성’을 매개로 만들어낸 두 종류의 집단은 ‘휴이넘’과 ‘야후’이다. ‘휴이넘’은 말이 지배하는 나라의 이름이자 동시에 그 나라에 사는 말들을 지칭한다. 말들의 나라에서는 이성과 사랑의 지배를 받으며 거의 모든 주제에 대해 만장일치 합의를 보는 이상적 사회를 구현한다. 이에 반해 ‘야후’는 인간과 유사하게 생겼지만, 이성이 부족한 휴이넘의 노예를 지칭한다. 작가는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짐승과 같은 야후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 이 나라에 수없이 많다”고 일갈한다. ‘야후’라는 상상의 존재를 만들어 놓고, 이성이 훼손된 인간들을 꼬집고 있음이다. 


이렇게 길게 조나단 스위프트의 상상력을 늘어놓은 것은 수많은 야후들이 우리 사회에서도 어른거리기 때문이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스리슬쩍 뭉개고 넘어가려는 군상들, 깊은 슬픔 속에 놓여있는 유가족들에게 막말을 쏟아놓는 군상들, 유가족의 단식을 조롱한 군상들, 교황의 가슴에 달린 노란리본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는 군상들... 이들을 보면 스멀스멀 야후의 냄새가 느껴진다.    


최근 우리나라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와 메시지는 손상되어 가는 우리의 이성을 치유하는 좋은 계기가 됐다. 교황은 물질주의의 맞서고, 비인간적 경제모델을 거부할 것이며, 사회적 약자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전달했다. 특히나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중립을 지킬 수 없다"는 교황의 메시지는 우리사회가 귀 기울여 들여야 할 큰 울림이다. 


교황은 방한 기간 내내 세월호 유가족의 아픔을 어루만지는데 집중했다. 세월호 십자가 순례단을 만났고, 그 십자가를 바티칸으로 가져갔다. 광화문에서는 단식중인 유민 아빠를 만나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다. 유가족인 승헌 아빠에게는 세례를 주었다. 팽목항에 있는 실종자 가족들에게는 자필 편지를 보내 위로하고 아픔을 함께 했다.  



△ “교황 ‘중재리더십’···모두의 말 들었지만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8월 20일. 조선일보, 5면 기사 캡쳐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땅의 야후들은 애써 이를 외면하고자 했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교황과 유민 아빠의 만남을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짤막한 단신으로 처리했다. YTN도 아예 누락했고, MBC는 교묘한 편집을 통해 이 만남의 의미를 감소시켰다. 더구나 조선일보는 20일자 신문(“교황 ‘중재리더십’···모두의 말 들었지만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5면 최상단기사)에서 교황이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고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했다. ‘기레기’라 지칭됐던 언론의 야후 본색이다. 어차피 그들에게 이성을 바라는 것이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는 어찌해야 될 것인가. 조나단 스위프트의 문제의식은 세기를 넘어 아직도 유효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