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포커스(~2023)_
죽음 앞에 선 ‘유민 아빠’와 조중동 (김종철)[언론포커스] 세월호 특별법과 보수언론의 끈질긴 왜곡프레임
죽음 앞에 선 ‘유민 아빠’와 조중동
김종철(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장)
지난 8월 16일 아침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프란치스코 교황은 시복식을 집전하기 위해 경복궁 정문 앞에 차려진 제단을 향해 떠났다. 한국산 소형차에 탄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주로 어린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축복을 해주었다. 경호원들에 에워싸인 교황의 행렬이 이순신 장군 동상 부근에 이르자 차가 천천히 멈추었다.
△ 8월 16일,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유민아빠' 김영오씨와 만나 편지를 건네 받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 ‘유민아빠’를 만나다
보도 위로 내린 교황은 34일째 죽음을 무릅쓰고 단식을 하고 있는 ‘유민 아빠’ 김영오 씨 앞으로 다가섰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 유민 양의 아버지는 교황이 내민 두 손을 맞잡으며 허리를 깊이 숙여 절을 한 뒤 노란 표지에 싸인 편지를 전했다. 교황은 그것을 직접 제복 오른쪽 호주머니에 넣었다. 편지에는 이런 호소가 담겨 있었다.
“제가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것은 유민이가 제 가슴 속에서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저만의 사건이 아닙니다. 생명보다 이익을 앞세우는 탐욕적인 세상, 부패하고 무능하며 국민보다 권력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부라는 인류 보편의 문제입니다. 우리 정부를 압박해 주십시오. 그래서 힘이 없어 자식을 잃고 그 한도 풀어주지 못하고 있는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꼭 넉 달이 되던 바로 그날 유민 아빠와 교황의 극적인 만남을 보면서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나도 가슴이 벅차서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것은 즉흥적 이벤트가 아니었다. 바로 전날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이 “단식을 하고 있는 김영오 씨를 꼭 만나주시라”고 부탁한 데 대해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교황이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박 정권의 기대와 달랐던 교황 방한 효과
그 극적인 장면을 지켜본 대통령 박근혜와 새누리당 사람들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까? 교황의 방한을 성사시키려고 음양으로 갖은 노력을 다했는데 바로 그 ‘사건’ 하나로 모든 ‘기대효과’가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방문 기간에 억눌리고 소외당한 이들, 특히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족들에게 가장 깊은 관심과 ‘애덕(愛德)’의 눈길을 보냈다. 박근혜는 서울공항에서 교황을 영접하던 때, 그리고 청와대에서 간단한 회담을 하던 시간 말고는 4박5일 동안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져버렸다.
교황이 방한 기간에 ‘아픈 사람들’에게 보인 사랑과 연민에 대한 진보적 언론과 보수언론의 보도는 판이했다. 교황과 ‘유민 아빠’의 만남에서 그것이 여실히 드러났다. 8월 16일 오후부터 여러 매체의 인터넷판 머리(네이버 뉴스스탠드)에 오르기 시작한 기사들을 보면 그런 사실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교황과 유민아빠의 극적인 만남’ 애써 감추는 조중동
한겨레, 경향신문, 미디어오늘, 오마이뉴스, 노컷뉴스, 프레시안은 교황이 파격적으로 김영오 씨를 만난 사건을 하나같이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조선일보 인터넷판 머리기사 제목은 「비닐봉지·질서정연···100만명 모인 광화문 ‘감동’」이었다. 기사는 A4용지로 석 장이나 되는 기나긴 분량인데 교황과 김영오 씨의 만남에 관한 내용은 끝부분에 딱 석 줄이 나왔을 뿐이다. “오전 9시 30분쯤 교황은 카퍼레이드 도중 노란색 플래카드를 든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자 차에서 내려 이들을 위로했다. 유가족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교황에게 노란색 편지를 건네며 ‘잊어버리지 말아주십시오, 세월호’라고 말하자, 교황은 눈물 흘리는 이 남성의 손을 맞잡으며 위로했다.” 그 ‘남성’이 34일째 단식을 하고 있는 김영오 씨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은 것이다.
중앙일보 인터넷판 머리기사는 「교황 “가난한 사람의 울부짖음이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김영호 씨에 관한 내용은 기사 중간에 일곱 줄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그의 실명을 밝힌 것이 조선일보와 다른 점이었다. 동아일보 인터넷판 머리기사( 「차에서 내린 교황, 세월호 유가족 손 잡아」)는 ‘단식농성 34일째’인 김영오 씨가 교황을 만나는 장면을 조선·중앙일보보다 몇 줄 더 길게 보도한 점이 눈에 띠었다.
조중동은 ‘프란치스코 효과’를 덮기 위해 또 어떤 왜곡 프레임을 짤까?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뒤 박근혜 정권이 드러낸 무능과 책임 회피에 대해 조중동은 입을 다물다시피 하거나 오히려 두둔하면서 7·30 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이 ‘압승’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새정치민주연합의 참패 이후 원내대표로서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은 박영선이 독단적으로 세월호 특별법에 관해 새누리당의 손을 들어주자 지극한 찬사를 보냈다.
세월호 참사 유족들과 시민사회가 박영선의 섣부른 양보를 격렬히 비판하자 동아일보는 「세월호 타협 뒤집는 강경파에 끌려가면 야당 또 망한다」(8월 9일자 사설)라는 협박성 ‘논조’를 펼쳤다.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총회가 특별법 합의를 없던 일로 해버리자 조선일보는 「합의 파기에 경제법안 심의도 거부하는 야, 어쩌자는 건가」(8월 13일자 사설)라고 공격했다. 세월호 특별법보다 경제법안이 더 우선적인 민생 문제라는 궤변이었다. 중앙일보는 8월 13일자에 「꿈쩍 않는 여당, 떼쓰는 강경파···괴로운 박영선」이라는 기사를 크게 내보냈다.
세월호 특별법의 핵심은 조사특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조사 대상은 세월호 침몰 이후 7시간 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대통령 박근혜부터 참사에 관련된 모든 공직자들까지이다.
교황이 한국을 떠난 뒤에 박근혜 정권이 물에 물 탄 듯한 특별법을 만들자고 계속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토록 공을 들인 교황의 방한이 핵폭탄 같은 위력을 지닌 부메랑이 되어 박근혜에게 날아갔기 때문이다. 이제 조중동은 또 어떤 프레임을 통해 ‘세월호의 수렁’에서 정권을 구해내려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