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비현실주의적 폭로의 현실적 무게 (엄경철)[시시비비] 내부폭로로 드러난 KBS 길환영 사장의 보도간섭
비현실주의적 폭로의 현실적 무게
엄경철(KBS 기자,민언련 정책위원)
억지스러울 정도로 극적 전환이다. 시작은 ‘세월호 희생자 수와 교통사고 사망자 수 비교’ 논란이었는데 어느덧 ‘권력의 KBS 통제’ 의혹으로 순간 이동했다. 폭로의 주체가 KBS 보도국장이어서 유례가 없고 놀랍다. 기자회견장에서 보여준 김시곤 KBS 보도국장의 당당함과 그 칼끝이 겨냥하고 있는 길환영 KBS 사장의 초라함이 마치 초현실주의 그림을 보는 듯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KBS 추락의 끝을 알 수 없는 참담함이다. 물론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5월 9일 뉴스타파의 관련 보도 화면 갈무리
황당한 내부 폭로, 사실성의 무게
“길환영 사장은 언론에 대한 어떤 신념과 가치관도 없이 오로지 권력의 눈치만 보며 사사건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왔다. 길환영 사장도 물러나야 한다” “윤창중 뉴스를 톱뉴스로 올리지 말라고 한 적도 있다. 길환영 사장은 대통령만 보고 가는 사람이다”
발언의 내용으로만 보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공영방송 장악에 저항해온 KBS 새노조의 규탄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직 KBS 보도국장이다. 듣는 사람 모두, ‘정말?’을 반복해야 했고 귀를 후벼야했다. 박근혜 정부의 KBS 보도가 정권홍보 수준이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아왔고 KBS 보도국장은 그 비판의 핵심 인물일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가 폭로한 것이다. 이럴 때 황당하다고 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 황당함을 가라앉히면 이 발언의 사실성이 무겁게 다가온다. 국정원의 뒷조사와 감시가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데 지금 감히 KBS 보도국장이 없는 말을 하겠는가! 지금껏 KBS 내부자 가운데 이런 고위직이, 그것도 현직에서 치부를 폭로한 적은 없었다.
무기력한 제도, 무책임한 KBS
이쯤되면 KBS 사장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사법처리의 대상이어야 한다. 방송법과 제도는 공영방송 KBS의 독립을 명문화하고 있다. ‘방송사업자는 방송편성책임자를 선임하고 방송편성책임자의 자율적인 방송편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방송법 4조는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법적 조치의 징후도 없다. 법과 제도의 유린 앞에서 평소 법치주의를 부르짖던 정부는 딴얼굴이다. 정치적 득실이 정부의 행동기준임을 여기서 다시 확인한다.
이런 반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김시곤 보도국장은 길환영 사장의 보도 개입과 독립성 침해를 왜 이제야 폭로하는가. 그동안은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이다가 물러나라는 압력에 반발한 것에 불과한가? 만약 김시곤 국장이 사장의 보도 개입에 반대해왔다면 국장 자리를 1년 넘게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김시곤 국장은 그동안 순종적이었다고 추론하는게 합리적이다. 법과 제도만으론 공영방송 KBS의 독립성, 자율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KBS 종사자들의 노력과 항거 없이는 언론의 자유와 독립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KBS 수뇌부는, KBS는 무책임하다.
권력의 후안무치, 체제의 위기
“(유가족의) 이야길 들어보니까 상황이 대단히 심각하다. 그래서 어렵게 KBS에서도 좀 노력해 줄 것을 부탁드렸다, 그 결과 보도국장이 사의를 표시하고 길환영 KBS 사장이 대표를 만나는 것 같다”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의 발언이다. 표현은 ‘노력해 줄 것’이었지만 KBS는 청와대의 ‘오더’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유가족의 항의에 아침까지도 꿈쩍하지 않던 KBS 사장이 그렇게 빨리 고개를 숙인 이유는 오직 청와대에 있음을 김시곤 국장이 폭로하지 않았던가.
더 큰 문제는 청와대 정무수석이 공개적으로 무슨 업적이라도 되는 듯 자랑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다. 법과 제도로 보장된 KBS 독립성을 권력이 전화 한 통으로 무너뜨리고 이걸 공개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관행의 후퇴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비용과 고통을 앞으로 우리사회에 요구할 것이다.
한국사회를 자유민주주의라고 말할 때 언론의 자유는 특히 핵심 가치이다. 권력에 의한 언론 자유의 후퇴, KBS 장악은 그래서 체제의 위기이고 헌법 유린이다. 헌법적 가치의 훼손이 끊임없이 반복돼 관행이 되고 있다. 그 결과가 가져올 ‘미개한 사회’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