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_
보도지침 폭로 30주년 기념 시민 선언
민주주의와 언론통제는 같은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2016년 한국 시민들은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은 권력이 어떤 행태까지 벌였는지 확인했습니다. 또한, 언론이 권력에 아부하며 진실을 외면할 때 민주주의가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도 생생하게 목격했습니다.
30여 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찬탈한 군부독재세력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시민들이 진실에 접근하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들은 보도 가(可), 보도 불가(不可), 절대 불가라는 판단을 내리고 보도의 방향·내용·기사 크기와 위치까지 세밀하게 언론에 지시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 이야기입니다. 당시 언론은 부끄럽게도 보도지침을 지면에 충실하게 반영했습니다. 언론이 권력을 감시·비판하기는커녕 정권의 선전 도구로 추락했던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어둠이 아무리 짙어도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30년 전 송곳 같은 언론인들이 군사독재정권의 언론통제 실상인 ‘보도지침’을 폭로했습니다.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해 온 사제들이 보도지침 폭로에 동참했습니다. 양심적인 법조인들은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변론을 펼쳤습니다. 민주 시민들이 석방운동에 동참하고 국경을 초월한 국제 연대도 펼쳤습니다. 보도지침 폭로는 이듬해인 1987년 6월 민주대항쟁의 불씨가 되어 한국 사회 민주주의 역사의 한 장을 썼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등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민주주의 운동의 과실을 가로챈 언론계 사익 추구 세력들이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패악을 저지르고 있지만, 이것만 바로 잡으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최소한 정치권력이 언론을 통제하려는 유혹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순진한 생각이었습니다. 보수 참칭 세력이 정치권력을 쥐자 정책 비판 프로그램을 방송했다는 이유로 제작진을 범죄자 취급하며 체포했습니다. 방송사에는 낙하산 사장을 내려보냈고, 반발하는 언론인을 내쫓았습니다. 사장과 경영진의 말 잘 듣는 기자 아닌 직원들이 정권 홍보만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정권의 이익’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30년 전 보도지침 시절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방송이 먼저 알아서 정권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것뿐입니다.
정권이 언론을 통제하고, 언론이 제 역할을 내버린 결과를 우리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사상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로 확인하고 있습니다. 2014년 ‘비선 실세’ 보도가 처음 나왔을 때 언론이 제 역할을 했다면, 국정농단 사태를 2년 전에 끝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낍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올해 7월 청와대 홍보수석이 공영방송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이 봤다며 보도 내용을 바꿔달라’는 둥 노골적으로 보도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냉소하고 말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30년 전 보도지침을 다시 읽을 것을 제안합니다. 군사독재정권의 보도지침을 다시 읽고, 군사독재정권 후예들의 언론통제 방식도 함께 확인합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언론을 감시하는 시민이 눈을 부릅떠야 합니다. 다시는 그 어떤 정권도 언론통제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제대로 감시해야 합니다.
한편, 언론이 통제되는 야만의 시절을 겪으며 고뇌하는 언론인들에게도 말합니다. 더 늦기 전에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십시오. 지금도 늦었습니다. 더 늦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언론 통제 사례와 자발적 순종에 대해 시민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언제까지 ‘언론도 공범’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 나라의 민주주의가 어떤 상태인지를 보려면 그 나라의 언론을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그 어떤 나라에도 ‘보도지침’은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언론 통제라는 말은 같은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정치권력이 언론을 통제한 야만의 시절로 2016년을 기록합시다.
동시에, 시민들이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한 희망의 시절로 2016년을 기억합시다.
2016년 12월 16일
보도지침 폭로 30주년 기념식 참가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