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경향신문마저 ‘기사 거래’…‘언론 상업화’ 이젠 막아야 한다
등록 2019.12.2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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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사원주주회사로서 스스로 “모든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구조”임을 공식 비전으로 내세우고 있는 경향신문이 자본 권력 앞에 무너지고 있다. 지난 12월 22일, 한국기자협회 경향신문지회는 성명을 발표해 독자에 사과를 전하는 한편, 경향신문이 대기업 SPC로부터 협찬금을 약속 받고 SPC 관련 기사를 삭제했다고 폭로했다. 해당 기사는 12월 13일 1면과 22면에 게재될 기사였으나 SPC가 기사 삭제를 요청하며 협찬금 지급을 약속했고 이 과정에서 경향신문 사장과 광고국장은 구체적인 액수까지 언급했다고 한다. 편집국장 역시 기사 삭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기사를 작성한 기자는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사표를 제출했다. 경향신문에서 잇따라 벌어진 이러한 ‘기사 거래’ 사태에 우리는 분노를 넘어 절망을 느낀다. ‘독립언론’의 대표주자인 경향신문마저 기사를 거래 대상으로 취급한다는 사실에 시민들은 우리 언론계에 더 이상 희망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기사 거래’는 권력 견제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은 물론, 개별 기자들의 직업 윤리 및 자긍심까지 짓밟는 악습이다. 그나마 경향신문 일선 기자들의 용기 있는 목소리로 언론계의 추악한 뒷거래 실태가 알려졌으니 경향신문을 포함한 언론 모두가 그간의 ‘기사 거래 관행’을 고백하고 악습을 뿌리 뽑겠다는 실질적인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경향신문의 ‘기사 삭제 사태’, 본질은 ‘기사 거래’다

경향신문 기자들의 폭로로 확인할 수 있는 사태의 면면은 ‘기사 거래 관행’이 우리 언론계에 뿌리 깊게 구조화되어 있으며, 악습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일상에 스며들었음을 암시한다. SPC 관련 기사가 나가기도 전에 SPC가 기사 삭제를 요구하며 돈을 들이밀었다는 점은 그 기사가 나갈 예정이라는 정보가 사전에 SPC에 입수됐음을 의미한다. 경향신문 기자들은 성명에서 “최근 3~4년 사이 기업에 기사 사전 정보가 새는 일이 늘고 기업 기사에 대한 내부 견제도 심해졌다”고 토로했다. 또한 그러한 대기업의 ‘거래 제안’에 경향신문 사장과 광고국장이 액수를 흥정했다는 사실에서 이러한 ‘거래’가 처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3월엔 ‘알아서 기었던’ 경향신문, ‘언론 상업화’의 일면일 뿐

지난 3월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기획기사’ 보도 무산 사건이 채 1년도 지나기 전에 또 경향신문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참담할 따름이다. 3월 사태 당시엔 구체적인 ‘거래’나 ‘압력’이 작용하기도 전에 경향신문 사측이 현대차, 한화, SK 등 대기업 이름이 한꺼번에 나와 ‘부담감’을 표했다고 한다. 3월엔 관성화된 대기업과의 ‘기사 거래’로 사전 기사검열이 벌어졌다면 이번엔 ‘기사 거래’를 실제로 시도하다가 일선 기자들의 저항이 터져나온 것이다. 주주 구성 대부분이 직원들인 경향신문마저 기사를 대기업과의 돈 거래 대상으로 삼고 있으니 최근 다방면으로 제기된 언론계의 내면화된 상업주의, 일상화된 ‘기사 거래’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 뉴스타파 보도를 중심으로 △불법적 기사 위장 광고 △컨퍼런스와 포럼을 빌미로 벌어지는 기업에 대한 티켓 및 협찬금 영업 △홍보대행사를 브로커처럼 끼고 자행하는 적나라한 기사 거래 등 도저히 언론이 저질렀다고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알려진 바 있다. 경향신문 기자들은 성명에서 “다른 회사가 다 한다는 이유로 포럼을 시작하고 구성원 합의 없이 해마다 연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언론사들의 모든 탈법‧불법적 영업행태에서 경향신문도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한 해에만 2번 ‘기사 거래’ 폭로한 경향신문 기자들, 이젠 모두가 나서야

자본과 권력을 견제하고 그들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 언론의 본령이기 때문에 언론이 대기업과 거래를 한다는 것, 심지어 기사를 그 거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언론의 존재 이유를 언론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기사를 팔아 장사를 하겠다면 언론사 간판을 내리고 홍보대행사로 직종을 변경해야 옳다. 이러한 관행이 이미 오래 전에 만성화됐음에도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책임 역시 스스로의 치부를 들추지 않는 언론에 있다. 그나마 경향신문 기자들이 올해에만 2번 ‘기사 거래’가 공론화되었으니 경향신문은 기자들이 약속한 것처럼 당장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려 사태의 전말을 면밀히 밝히고 재발방지책을 제시해야 한다. 다른 언론사들은 들키지 않았다고 안도할 것이 아니라 더 이상 기사를 거래 대상으로 삼지 않겠다는 대국민 선언에 나서야 한다. 기자들도 더 이상 숨지 말고 경향신문 기자들처럼 아주 기본적인 직업 윤리만큼은 지켜주길 바란다.

 

‘언론 상업화’의 공범인 기업도 반성하고 대안 내놔야

더불어 언론사가 ‘기사 매매 중개사’로 전락한 현 상황에 기업들의 책임도 크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번 경향신문 사태에서 자사 기사를 삭제하라며 협찬금 지급을 운운한 SPC는 똑같은 짓을 과거에도 벌인 바 있다. 2013년 9월 SPC는 인터넷 매체 <고발뉴스>에 “광고를 집행할테니 기사를 내려달라”고 요구했다가 <고발뉴스>로부터 거절당했다. 지워달라는 기사는 SPC 자회사인 파리크라상이 가맹점 점포에 갑질을 하다가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뉴스타파 <‘로비스트박수환 문자>에 따르면 2015년 4월 조선일보가 ‘신제품 빵’을 광고해준 1단짜리 짧은 기사는 SPC가 무려 1억 원을 주고 산 거래의 결과 였다. 뉴스타파 보도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월~6월) 그 정도가 너무 심해 한국광고자율심의기구가 경고 및 주의 처분을 내린 불법적 기사형 광고(기사와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진 광고)만 한 신문사에서 하루 2~3꼴이었다. 업종과 규모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기업들이 대부분의 주요 신문사에 불법적 기사 위장 광고를 내고 있다. 기업들이 언론을 자신들의 홍보 기구 쯤으로 취급하거나 돈으로 통제하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는 최근 미디어 환경의 급변으로 생존이 어려워진 언론사들의 경제 사정과 맞물려 우리 언론의 후진적 상업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민주사회 좀먹는 ‘기사 거래’, 근절 위해 모두가 나서자

기업과 언론, 더 나아가 권력과 언론의 기사 거래는 장기적으로 모두의 파국을 초래할 뿐이다. 자본과 권력의 부패를 감시하고 비판하는 언론이 부패를 숨기려는 자본과 권력에 종속된다면 바로 그 부패 때문에 자본과 권력도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도는 사고 팔아서는 안 될 민주주의적 가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의 자유를 헌법이 보장하고 시민들 역시 사회적 의제을 설정할 권력을 언론에 맡기는 것이다. 이번 경향신문 사태를 계기로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기사 거래 관행’을 뿌리 뽑기 위해 행동에 나서야 한다. 언론사와 기자들, 기업들이 책임 당사자로서 국민에 사과하고 대안 마련에 앞장설 것을 촉구한다.

 

 

2019년 12월 23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 (직인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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