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_
장애인 안전 외면한 지상파 산불 재난 방송이야말로 재난 그 자체다
등록 2019.04.05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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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4월 4일)부터 시작된 강원도 고성 일대에서 발생한 산불 관련 보도를 하면서 재난주관방송사인 KBS를 비롯한 방송사들이 수어 방송을 매우 제대로 하지 않았다. 장애인들의 안전을 내팽개치는 재난 수준의 재난방송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제 재난방송에서 장애인을 위한 수어 통역을 지원한 방송사는 한 곳도 없었다. 화재 직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는 소셜미디어에 KBS와 MBC 재난 속보에 수어통역을 지원해 달라는 글을 올렸다. 전장연은 “속초, 고성 지역에 있는 분들이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다. 그 중에는 청각장애인도 있을 것”이라며 “그런데 국가재난주관 방송국인 KBS는 물론 MBC 등 공중파 뉴스 속보에선 수어 통역이 전혀 없는 상황이다. 장애인도 재난 속보를 듣고 안전해질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호소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다시보기 영상과 편성표 등을 통해 지상파 3사와 종합편성채널 4사, 보도전문채널 2사 총 9개 방송사의 수어방송 여부를 확인했다. 산불 확산에 따라 지난 4일 밤부터 오늘 자정 사이 KBS를 비롯한 지상파 방송들은 정규 편성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속보 체제로 전환했지만, 어느 방송사도 수어방송을 하지 않았다. 이들 방송사의 수어 방송은 피해 지역 주민들이 한창 긴급 대피를 하던 시점이 지난, 이미 실컷 시민들이 비판을 쏟아낸 5일 오전에야 시작됐다.

그마저도 종합편성채널인 JTBC와 TV조선, MBN(이상 오전 7시)이 먼저 수어 통역을 시작했다. 재난주관방송사인 KBS는 오전 8시부터 수어 통역 방송을 지원했고, MBC와 SBS는 각각 오전 11시 30분, 오전 9시 50분에 겨우 수어방송 지원에 합류했다. 채널A는 오전 9시 20분에 수어방송을 시작했으며, 보도전문채널인 YTN과 연합뉴스TV는 각각 오전 11시, 오전 11시 44분에야 수어방송 지원에 나섰다. 부끄러운 현실이다. *4월 9일 오후 2시 각 방송사의 수어방송 시작 시간 일부 수정했습니다.

 

제도가 미비한 것인가

그렇다면 한국은 장애인의 방송 접근권을 보장하지 않아도, 재난보도에서 장애인을 배제해도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한국은 방송법 등에서 장애인의 방송 접근권을 구체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우선 방송법 시행령 제52조 제2항은 지상파 방송과 종합편성방송, 보도전문채널 등에 장애인 방송의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고 방송법 제69조(방송 프로그램의 편성 등) 제8항은 “방송사업자는 장애인의 시청을 도울 수 있도록 한국수어ㆍ폐쇄자막ㆍ화면해설 등을 이용한 방송을 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또한 장애인복지법 제22조(정보에의 접근) 제2항에서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방송국의 장 등 민간 사업자에게 뉴스와 국가적 주요 사항의 중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방송 프로그램에 청각장애인을 위한 한국수어 또는 폐쇄자막과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또는 자막해설 등을 방영하도록 요청하여야 한다”고 밝히고 있으며, 제4항에서는 “요청을 받은 방송국의 장 등 민간 사업자와 민간 행사 주최자는 정당한 사유가 없으면 그 요청에 따라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방송법과 장애인복지법 등을 통해 장애인의 방송접근권을 구체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재난 상황에서의 장애인의 시청권 또한 마찬가지다. 방송법 시행령 제52조(장애인의 시청지원) 제1항은 “방송사업자는 장애인의 시청을 돕기 위하여 방송프로그램에 대하여 한국수어·폐쇄자막·화면해설 등을 이용한 방송을 하여야 한다. 다만, 다음 각 호의 방송프로그램을 제외한 방송프로그램의 경우에는 방송통신위원회가 방송사업자의 제작여건과 시청자의 수요를 고려하여 장애인방송을 하여야 하는 비율을 정하여 고시할 수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이 조항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다. 우선 모든 방송이 기본적으로 장애인을 위한 서비스를 해야 하지만 방송사업자의 제작여건 등을 고려해 일정 비율을 정해, 즉 의무편성 비율 안에서 장애인 방송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면서 의무편성 비율 안에 포함되지 않는 방송(‘다음 각 호의 프로그램’)을 별도로 적시해 뒀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방송통신발전기본법 제40조에 따른 재난방송 프로그램이다. 즉, 재난방송에서의 자막과 수어, 화면해설 서비스 등의 지원은 의무편성 비율과 상관없이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안전’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가 누려야만 하는 권리이기에, 재난방송에서도 이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렇듯 모든 방송사는 재난방송에서 장애인 방송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에도 어제 재난주관방송사인 KBS를 비롯한 방송사들이 장애인들의 안전을 내팽개치는 재난 수준의 재난방송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재난 수준의 재난보도’가 나온 배경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방송사들이, 특히 지상파 방송사들이 이런 몰상식한 수준의 행태를 보인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는 재난주관방송사인 KBS를 비롯해 국민의 재산이자 공공재인 전파를 사용하는 지상파 3사의 이런 뒤늦은 대응을 실수라고 보지 않는다. 평소 장애인 등을 위한 방송서비스를 시청자를 위해 당연히 해야 하는 보통의 서비스로 인식하지 않고, 정부 예산이나 기금을 통한 지원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예외적인 서비스로 인식하고 있기에 이번 같은 재난 상황에서 법에서 정한, 당연히 해야 하는 수어 통역 등의 지원을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언론개혁시민연대, 장애의 벽을 허무는 사람들 등 13개 시민사회단체가 KBS의 저녁 종합뉴스 <뉴스9>에서 수어방송을 제공해 달라고 요청한 데 대해 KBS는 TV화면의 제약성, 즉 TV화면 하단 한 쪽 끝 부분이 가려짐으로 인해 비장애인 시청자들이 느낄 불편을 이유로 들며 현재 실시할 수 없다는 답을 내놨다고 한다.

KBS 구성원이 스스로 만든 ‘KBS 공정성 가이드라인’ 속 “소수계층의 사람들도 고루 참여하고 시청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의 전체 장르에 걸쳐 제작 요소와 시각적 장치들을 적합하게 준비하도록 고민한다”는 규정을 내재화했다면 과연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재난의 순간은 물론이고, 저녁종합뉴스에 대한 수어방송 지원은 당연한 것으로 시스템 안에서 제공되었을 것이다.

 

반성하고, 사과하고, 시스템을 마련하라!

우리는 KBS만이 아닌 모든 방송사들이 장애인의 방송 접근권 보장에 대한 인식을 재정비하길 요구한다. 장애인방송 편성 및 제공 등 장애인 방송접근권 보장에 관한 고시(이하 장애인방송 편성 고시)에서 정하고 있는 편성고시를 충족하는 게 목표여선 안 된다는 얘기다. 장애인방송 편성 고시에 따라 지상파 방송사들과 종합편성채널, 보도전문채널 등은 방송시간 중 수어방송은 5%, 화면해설방송은 10%를 의무 편성해야 한다.

그러나 이 비율은 말 그대로 의무 편성해야 하는 비율일 뿐이다. 장애인의 시청권을 ‘최소’ 이만큼은 보장하라는 것일 뿐, 방송사가 추구해야 하는 ‘최대’ 목표가 아닌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시청자의 시청권 보장에 차이를 두는 게 당연한 인식 자체를 개선하지 않으면 재난 상황에서 장애인 시청자들을 차별하고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은 단언컨대 다시 발생할 수밖에 없다.

방송통신위원회(이하 방통위)에도 요구한다. 방송 재허가·재승인 평가에 반영하는 방송평가의 ‘장애인 시청지원 프로그램 편성 평가’ 항목에서 단순히 장애인방송 편성 고시에서 의무로 정한 편성 비율을 달성했는지 여부만을 평가하는 데 그치지 말고, 이번처럼 재난방송에서 수어방송 지원 등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페널티를 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물론 규제와 제재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진 않는다. 하지만 재난 상황에서 국민의 안전을 위해 방송이 수행해야 하는 의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장애인의 안전권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안전은 결코 선의에 맡길 문제가 아니다. <끝>

 

4월 5일

(사)민주언론시민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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